성경의 문자적 무오류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SBS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SBS는 주석보다 inductive method를 사용하여 성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성령의 계시하심과 context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성경을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그 때 당시 느꼈던 점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성경에는 바르다고 생각되는 것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실수나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죄악상들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성경은 솔직한 책이며, 가식을 거부한다. 또한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성경이 원래부터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믿음의 조상들의 실패적인 모습이 기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에 대한 부분(part)의 인간적 실수나 부족함들이 용납되지만, 왜 기록상에 있어서 실수나 부족함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서 포장하질 않으신다. 있는 그대로 보시며 있는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으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다.

성경을 기록했던 성경 기자들은 어떠할까?
만약, 성경이 문자적으로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의 잘 통제받는 존재로, 자유를 부여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 실수적인 문자의 기록들이 있다. (여러 요인에 의해 문자가 잘못 기록되어 있을 수 있다. 알다시피,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서 형성되어 온 것이지, 이것이 성경이라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심(실수조차도, 부족함조차도 사용하심), 동역자로 삼으심등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보여준다.

성경에 실수적인 기록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등이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기자의 기록과정에서 문자의 실수적인 부분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손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은 성경 기자를 로보트처럼 만들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어야 한다라고 전제를 만들어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또한 제한할 수 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행하심은 오류가 없다.
그러나, 성경 자체의 문자적 표현들에 대해서 오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다소 위험한 표현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그 정확한 의미를 어떤 문자에도 정확히 담아낼 수 있을까? 문자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표현이다.
나 조차도 나의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한국말의 단어로 정확히 표현될 수 없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 오류가 전혀 없다고 사용하고 싶은 심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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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다가 내 안에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적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위로가 있으며 평안과 기쁨이 있다.
물론, 삶이란 그리 쉽지 않다.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움들이 많이 있고, 내 머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것들도 많이 있다. 물론, 내 마음 속에는 그런 어려움들이 해결되길 솔직히 원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서 이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까?
예수만이 오직 유일한 위로시며 영원한 소망되신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위로와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거리에 나가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전한다.
어떤 사람은 과격하게 전한다.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몇몇 사람들을 지하철에서 볼때, 거리에서 볼 때, 어찌 보면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비단, 그런 구호를 외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예수를 전하는 데 무섭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쳐다 보는 눈빛이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너 지옥의 길로 가고 있어 뭐 이런 식의 내재된 협박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제한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꼭 잘 못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싫다. 내가 평가하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좌우지간, 이런 생각들이 예수를 떠올리게 했으며,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믿도록 전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마태복음을 쭉 넘기면서 살펴봤는데,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증거했던 메세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에 대한 메세지였다.
이 메세지의 어감은 어떠했을까?


너희 회개 안하면 다 멸망할꺼야 이런 식의 메세지였을까?

4:23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3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4:24

뒷 구절들을 살펴 봤을 때, 나는 쉽게 예수님의 메세지의 초점을 잡을 수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에 대한 메세지의 강조점은 뒷 부분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천국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 고쳐지는 그런 것에 관련되어 있다. 23절...

즉, 예수님의 메세지는 세상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에 고통받고 힘들어 하던 사람들에게 위로함을 주는 메세지였던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렇게 예수님이 전하셨을 것 같다.

 
세상 가운데 어려움과 고통들, 병들로 인해 힘들어 하는 여러분들. 이제는 더이상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들에서 벗어나고, 회개하여 내게로 오십시요. 여러분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과 위로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있는 힘듬과 어려움들이 내게 나누어질 때, 나는 여러분들의 약함들을 고칠 것이고 천국의 소망을 줄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나아왔을 때도
예수님은 8:3절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8:7
세리와 죄인들이 왔을 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것처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9:12,13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지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은 딸아 안심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9:22
특히, 예수님은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격하게 말씀하신 부분이 있다.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부분들...
23장에 나온다. 그 대상은 누구냐면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약하고, 힘든 자들, 죄인들을 돌아보고 위로할 생각은 안 하고 정죄하고 자신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보였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전도 언어는 바로 사랑의 언어이셨다.
힘들지? 내게 오렴. 내 딸아, 내 아들아. 괜찮다. 어려운 점들을 내게 말하렴 내가 고쳐주겠다.
이런 표현이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방식은 어떠해야 할까?
주변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세상 가운데 많이 힘드시고 어려우시죠? 힘내십시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힘들고 어려운 점을 고쳐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평안이 넘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마, 이런 표현들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과격한 표현을 들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믿는 다고 하면서도 위선을 행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고 꾸짓는 사람들이다. ^^;;;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거꾸로 되어 있는 현실들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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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꼽으라면
난 단연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어제, 높은 뜻 숭의 교회 담임이신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 설교가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그분에게 가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의 상태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어 놓고 사람들 앞에서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우리는 가식적으로 만들 때가 많은 것 같다.
정작 삶이 힘들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하나님 앞에서 가식적으로 말하고, 감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나라가 정말로 고민되지 않으면서도 솔직히 나라의 문제들이 고민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하지 않고, 오히려 고민되는 것처럼 가식적으로 기도할 때가 많다.

또, 개인적인 문제들이 힘들면서도
마치, 그런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제들을 아뢰지 않고
그냥 부담감에서 뭔가 이상적이고 고상하다는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 놓는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하고 싶다.
솔직하고 진실 할 때,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며,
그 사랑과 은혜를 깊게 알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이 나라를 향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먼저 글에서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실 것이 있다는 마음을 주셨는데,
그것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이다.
분노가 되면 분노의 목소리를, 불공평하다면 불공평의 목소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것이다.
시편 처럼...

오늘 아침에 시편을 기도했다.
읽는게 아니라
내 목소리와 감정을 넣어 시편 그대로를 기도했다.
시편이 내게 놀랍게 다가 왔다.

마지막으로 토머스 머튼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 일부를 적어 보겠다.
필립 얀시의 기도라는 책에서 인용되었던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냐 아니냐에 특별히 개의치 않으신다.
주님은 그저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실 뿐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교만이다. 마치 모자라는 게 전혀 없다는 듯,
하나님께 의지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뜻에 따라 물질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듯 행동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에 올려놓으려는 또 하나의 교활한 술책이기 때문이다
.

저는 지금 조그만 시골 읍내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사역하시죠. 저는 그냥 하나의 통로가 될 뿐인데, 뭐 이런 거 하나  하나까지 가려서 쓰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학생부 아이들을 가르치고 같이 예배 드리고 있는데, 7명 정도입니다.
안 나올 때는 3명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그 조그만 읍내를 답답해 하면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그 생활에서 말입니다.

이 작은 읍내에도 여러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교회 저 교회 마다 특색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어떤 교회를 사정상 다녀오게 되었는데,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교인들을 참 잘 위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농사일로, 또는 여러 가지 힘든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참 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제 안에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제가 SBS를 하면서 나름대로 결론 내렸던 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욕심에서 이 모든 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삶에서 지치고 힘들고, 일상 조차도 힘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라는 말이 어떻게 다가올까요? 물론, 그것이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낀 것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제가 현재 이 상황에서 만나는 이 사람들에게 어떤 하나님의 방법과 어떤 하나님의 전달하시는 마음들이 필요한지를 물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급하게 의욕만 앞세워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제 안에 부족함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 안에 더욱더 넘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새 어딜가나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bdts 동기 모임때 뽑은 말씀 카드도 기도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왜, 하나님은 내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 모릅니다.

나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직접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는 않지만, 거의 하루종일 하나님 생각과 나의 모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말을 안하고 있다면 거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제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있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일까? 아닐까?

그러던 중, ihop의 24시간 기도 실황에 대한 것을 찾았습니다.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지더군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도 꼭 ihop과 같은 곳에서 기도했었는데...

어제, 오늘 아침 내내 ihop 기도 실황을 보면서 들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책 반납하러 가면서
도올 선생님의 도올 달라이라마를 만나다라는 책(총 3권인데)의 1권을 마저 읽고 2권 앞부분을 읽었습니다.
불교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석가의 깨달음이 참 깊구나라는 생각도 했죠.
도올은 불교가 연기라는 것으로 다 표현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으며, 원인이 제거 된다면 결과도 소멸되는 그런 순환의 흐름.

아무튼, 책을 다 반납하고 친구랑 이야기를 한다음, 앞에 서점에 갔는데, 갑자기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필립 얀시의 기도라는 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기도를 잘 모른다는 생각에서 샀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읽는 동안 많은 부분 생각하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나를 솔직히 그분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진정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제 기도에서 부족한 점이
하나님 앞에서 저를 진지하게 하나 하나 다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분께 초점을 많이 맞추고 있지만,
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할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은 기도 할 때,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어떠한 말씀을 들으려고만 노력하지 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솔직한 반응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순간 순간 느꼈던 감정들, 내가 필요한 것들, 내가 부족한 것들, 나의 화남과 기쁨들. 어느 것 하나 내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나누었는지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의 감정들을 쉽게 나누면서 하나님에게는 나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시편이 갑자기 생각났었습니다.
시편 기자들의 원망과 화남의 고백들, 절망의 고백들, 억울함의 고백들이 다 하나님 앞에 소리쳐서 나누어지는 모습들 말입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올 선생님의 책에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면, 자신의 상황을 나누고 이야기할 절대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슬퍼집니다.
앞서 게시한 글에는 성경을 읽고 성경기자(저자는 성령님)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관찰- 반복, 대조, 목록..등을 통해
 
그리고 단락제목을 달아보고 책의 구조를 통해서 기자가 전하고자 했던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해석이라고 했을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단순히 '이것은 무슨뜻인가? ' 라고 질문을 하기 전에
 
글을 쓴 저자가 있다면 그 글을 받아보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저자가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지연이 쓴 "시일야 방성대곡" 은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오적은 우리나라를 남에게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드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하였다. 또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백성들 (1905년 11월 20일)을 염두에 두고 발표한 글이었죠

 

을사조약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굴욕적인 사건이었는데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모든 글들은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됩니다.

 

성경도 그 기록된 시기가 있고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러한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몇가지를 살펴 볼까요

 

성경의 맨 처음 책 창세기 그리고 연달아 기록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두 모세가 기록했다고 추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언제적 사람이었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였던 대열에서 가장 선봉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처럼 모세는 430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마치고 곧 광야에서 방황하게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책들을 광야에서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때에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지루하게 느껴 졌던 많은 족보들이 애굽의 종에서 방금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생각해볼 문제이지요!!!

 
우리민족은 대체 왜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야 했는가?
우리가 가야할 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땅인가?
우리가 정복해야할 적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주신 약속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등 여러가지 의문들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를 주는 책들이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한가지 더 살펴 볼까요?
 
앞 글에 살펴보았던 디도서를 봅시다!~
 
디도서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디도와 관련된 책이지요!~
 
본문안에서 보면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그가 아들같이 여기는 그의 제자 디도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디도는 사도행전에서 보면 사도바울과 전도여행때 동행했었고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바울과 함께 그레데를 방문했다가 그레데에서 몇가지 일들을 위해서 그레데에 남겨졌습니다..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는데 장로들을 세우는 일과 교회안에 거짓교사들을 다스리는 문제등 몇가지 일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디도서에 보면 디도 개인에게 하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지만 당시 서신이 교회안에서 읽혀졌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에 디도 뿐 아니라 그레데 교회 교인들도 염두에 두고 디도서를 썼을 것입니다..
 
디도는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할 뿐아니라 본을 보여야 했습니다.
 
또한 꾸짖어야 할 대상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지침들(목록으로 관찰함)뿐 만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어떻게(꾸짖어라) 다스려야 할지등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레데 사람들 중에는 거짓말도 잘하고 술 취한 사람들 또 유대계거짓교사들등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도서는 그레데 교회들에서 읽혀 졌을 때 디도에게는 권위를 갖게하고 디도개인에게는 구체적인 목양의 방법들을 배우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창세기~신명기까지는 약속의 땅(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며
 
디도서는 사도바울이 그의 제자 디도와 그레데 교회를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책을 읽을 때에는 이 사람들(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디도 그리고 그레데 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지요
 
이것이 가장 올바른 해석입니다!!!
 
여기까지 두서없이 얘기를 늘어놨는데 이해가 되시는지요?
 
여기까지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성경을 해석할 때 "원독자"라는 개념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해석하시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관찰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근거로 그렇다면 "이것이 원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공부할 때
 
저자?
독자?
언제기록된것?
어디서 기록된것?
 
독자들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
 
어떤 문학양식?
 
이러한 요소들을 간략하게 라도 꼭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

제가 성경연구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느꼈던 것들을 몇가지 나누면서 성경연구에 대한 방법들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제가 성경공부모임을 나가서 느낀 것은 성경공부에 대한도움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실제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아이러니는 이러한 분들이 실제로는 성경을 읽지 않는 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성경의 보화를 캘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지식이나 지혜로 이해하기 힘든 영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할 때 성령을 통해서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썼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썼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모든 문화적인 환경과 상황들까지 사용하셔서 글을 남기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기전에 겸손하게 우리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성경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는 마음대로 한 책을 선택해서 시작할 수 있지만 각 책들의 연관성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이부분은 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우선은 생략하겠습니다)


우선 역사적인 사건별로 시간 순서로 구성되어있는 역사서는

창세기부터 창,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하, 왕상하, 에,느,스까지 순서대로 읽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레, 신, 룻, 에스더는 빼고 보더라도 역사적인 순서대로 읽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누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들(서신서도 연대별로 볼수 있는데 사도행전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전도여행 순서를 보면서 서신들의 연대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 살전후, 로마서, 고전후, 엡, 골, 몬,빌, 딛,딤전후)을 읽으면 예수님의 나심부터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들을 볼 수 있고 바울사도의 회심과 그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역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경을 순서대로 연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여기서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우선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다음은 성경을 읽는다.(한책을 선택해서 읽되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다 읽는다-이것은 중요함-영화를 며칠 나누어서 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우선은 짧은 책으로 시도하면서 성경공부의 재미를 붙여보자. 추천할 책은 디도서다. 짧지만 성경공부의 방법론을 익힐때도 참 좋은 책이라 생각이 된다.


실습


그러면 디도서로 일주일정도 공부를 해보자!~


준비물은 사모하는 마음, 성경, 색연필(12색이상)이다.


우선은 디도서를 펴놓고 기도하자!~


그리고 디도서를 한번 읽어보자(약 10분정도면 한번 읽을 수 있을 것이다)이때는 책전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감을 잡는다. 아!~ 바울이 디도에게 무슨말을 할려고 했구나!~ 정도만 알아도 된다.. 아니면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자.. 앞으로 디도서를 5번이상 읽게 될것이기 때문에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제 두번째로 성경을 읽으면서 색연필(12색정도)을 꺼내보자!~


디도서를 읽으면서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 색칠해보자!~ 1:1, 4절에 정답이 있다..


반복되는 단어나 주제들이 있는지 찾아서 색칠해 보자!~ "이는"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교훈", "선한 일"도 보이는가? 우선은 장을 가리지 말고 찾아보자. 또 "구주"라는 말이 반복되기도 한다.


또 어떤 인물이 나오는지 살펴보자. "디도", "장로들", "감독", "할례당", "그레데인"등등이 나온다.


대조되는 말들을 찾아보자.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과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장이"가 대조가 되는 말이다. 또 1:6"불순종하는 일이 없는"과 1:10 "복종치 아니하고"가 대조가 된다.. 1:16 "선한 일을 버리는 자"와 2:7 "선한일의 본을 보여"도 대조가 된다.. 이런식으로 본문안에서 여러가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차근 차근 색칠하면서 읽어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것이다..


어쩌면 목록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9 장로들(감독)의 조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고

제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디도서를 읽으면서 이정도를 관찰한 사람이라면 아주 Excellent!~ 한 사람이며 말씀의 진보가 급속도로 있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봅시다!~


디도서를 세번째로 읽으면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단락별로 구분하면서 내용을 정리해보십시요.


예를 들어서

1:1-3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기신 것

   4   디도에게

   5-9 장로들을 세우라는 구체적인 내용

   10-16 그레데사람들의 특징

2:1-10 그레데교인들을 위한 지침

   11-14 예수님이 하신일

   15-3:3 디도가 할 일

    .........................................등등

이렇게 적어가면 디도서내용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단락은 본인이 직접 나눠보시거나 나눠진 성경 예)NIV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단락내용을 요약해서 제목을 잡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 너무 주관적으로 흐를수 있기 때문에  본문에 나와있는 단어만 사용하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단락제목을 통해서 좀 더 큰 덩어리를 잡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문학작품의 단위를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어>문장>단락>장>소단원>대단원>책>성경으로 단위를 높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권의 책은 이처럼 단어들이 모여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서 단락이 됩니다!~


각 단락들은 장을 이루고 소단원 대단원 그리고 책이라는 완성품으로 만들어 집니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각 책들 66권이 모여서 하나의 큰 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디도서로 가서 디도서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디도서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저는 2:10절과 2:11절 사이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1:1-2:10 까지는 "디도에게 부여된 임무"

          2:11-3:15 까지는  "디도가 가르쳐야 할 것들"


그러면 한번 A4용지에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봅시다!~


첫번째 단락을 나누고


두번째 단락제목을 적고


세번째 단락을 두개의 장(혹은 대단원)으로 묶어본다.


네번째 제목을 달아본다!~


여기까지 잘 따라 오셨나요?


너무 많은 내용을 적은거 같아서 좀 미안한 마음이 있네요..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서 얻게되는 기쁨은 모든 곤란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이랍니다..


여기까지 해 보신 분들은 두가지를 남겼을 것입니다


우선 색연필로 부지런히 관찰한 흔적으로 성경책이 좀 칼라풀해져서(?) 한눈에 무슨 내용들이 들어있는지 좀 더 쉽게 들여다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A4한장에 디도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것을 우리는 수평차트라고 부른답니다)것을 만들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관찰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적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서 3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이 부분은 알다시피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서로 위탁되어야 하는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때 약간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됩니다.
5장 31절 3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절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들이 한 육체가 될지나
32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33절에서 보면 32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야기를 했지만, 33절에서 아내와 남편사이에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순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관계는 어떠한가? 를 설명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져오는데, 그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이상적인 관계안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참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남편과 아내를 한 몸이 되라고 하셨고, 한 몸 처럼 서로를 아끼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만 죄로 가득찬 인간의 모습은 완전한 하나님의 남편과 아내를 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한다면 완전하지 못한 관계로 적용하여 잘못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하고 이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바울의 생각이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시 주신 그 말씀의 관계를 사용하여 남편과 아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설명한 후,
그 관계를 생각하도록 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이와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독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서로 어떻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며, 그리스도가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으니, 교회(에클레시아,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의 모임)도 그리스도께 복종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에베소서의 전체 주제인 교회(성도들)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장 22절부터 33절까지 분량상으로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 5장 22절, 23절 전반부, 24절 후반부, 25절 전반부, 28절, 29절 전반부, 33절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 23절 후반부, 24절 전반부, 25절후반부 부터 27절까지, 29절 후반부부터 32절까지

분량으로보면 역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32절에서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죠.
33절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했으나,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에베소서를 나눈다면,
5장 22절에서 32절까지
그 다음 5장 33절에서부터 6장 9절까지를 나누겠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후자는 바울이 각 관계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것 같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거죠.

*** 오해되기 쉬운 부분들.
1. 남편과 아내의 권한 관계 - 이것은 이 문맥에서 핵심이 아닙니다. 이 문맥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보다는 중점 사항을 파악하도록 합시다.
2. 5장 26절 27절은 철저히 그리스도가 교회를 어떻게 하셨는지를 나타냅니다. 28절에 이와같이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이렇게 하라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앞에는 남편과 아내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3일정도를 에베소서에만 매달렸습니다. 수십번을 읽고 다른 번역본으로도 다른 언어로도 읽어보았으나, 에베소서가 명확히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자체가 어렵게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제 안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께 에베소서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면서 에베소서를 다시 읽고 다시 읽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그 논리적 구조도 그렇고, 그 사상들도 정말로 놀랍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의 사용에서도 전체적인 주제와 연결되는 고리가 크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를 1장 1절부터 하나 하나 적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에베소서 끝장 끝절까지 쓰려면 정말 많은 시간동안 꼬박 적어야 할 것 같아 대략적인 개요만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는가를 일단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베소서는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가 수신자를 염두해 두고 쓴 것이죠.
1:1 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단 수신자는 에베소라는 특정 장소에 있던 성도들과,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쓰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특정 지역 성도들과, 특정 지역이 아닌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문제점등을 지적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수신 계층은 유대인들과 유대인들 외에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확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신자들에게 있었던 문제점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2장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졌던 이방인들 사이의 분쟁들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4장 17절부터 5장 21절 정도까지 보면, 도덕적 타락의 모습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음행이라든가, 악독, 방탕 등등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따르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은 수신자들의 모습 속에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는거죠.

배경요소들을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에베소 지역의 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그 갈등은 자신만이 하나님의 선택되고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종류의 갈등들이었다. 또한, 교회 내에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옛날의 음행과 더러움, 탐함, 악독등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길로 계속해 따르던 모습들이 있었다.
물론, 더 자세히 들어갈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 적어 보겠습니다.


논리적 구조를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에서 3장까지는 Theology 부분입니다. 이론적인 부분이구요,
4장에서 마지막장까지는 application 부분으로 실천적인 부분이지요.
즉, 1장에서 3장까지는 4장에서 마지막장까지의 실천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적 부여를 제공하기 위한 장입니다.

배경과 논리적 구조에 관련된 부분은 여러 번만 읽어보셔도 금방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 계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정말 많이 반복됩니다. 또는 비슷한 말인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 등등 수없이 반복됩니다.
즉,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것이 에베소서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사랑을 보여 주셨으므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음행, 더러움들, 탐함들을 버리라는 이유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와 소망을 갖게 되었으므로 옛 사람의 모습들이었던 타락의 모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서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고 서로 도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도록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서도 서로에게 사랑하고 아낄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 장소의 개념아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순종하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도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하고 행하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6장 10절부터 끝까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나되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고 서로를 섬기게 되기 위해서는 6장 10절부터의 방법대로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를 가장 잘 요약한 성경구절을 찾으라면, 1장 10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를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동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서 주께 하듯 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정말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에는 시간의 시작과 공간의 시작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공간안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신학적, 철학적인 이야기를 집어 넣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쉽게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 가운데 사람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아담, 하와 둘만 영원토록 살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좌우지간 태초부터 공동체의 개념이 존재하게 됩니다.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그 삼위의 조화로운 교제를 인간 세상에도 공동체 안에 표현하십니다.
 즉, 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에 대해 제한적인 부분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철저히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혼자 신앙이 커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 기도하고 신앙이 자라갈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신약의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다 공동체의 성장을 아주 애절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공부를 정말 좋아합니다. 혼자 하는 성경공부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경 공부를 좋아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가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수십배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시고 광활하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됩니다.

신학도 그런 맥락에서 저는 봅니다. 저 혼자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전, 깔뱅을 공부하면서 깔뱅이 만났던 하나님을 듣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바르트 등 수 많은 신학자들과 그의 사상들을 통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을 듣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상이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보는 것과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나누어도 그 안에 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류시킵니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성경에 대한 공부가 선행 또는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 서적을 읽을 정도의 정성이나 그 이상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깨닫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에의 추구가  신학서적이나 위대한 신학적 사상가들에 대한 열정을 낳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신학자들과 대담을 하기 위해선 나도 그 신학자들이 만난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생각들을 경험하며 그 신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난 그 넓고 깊으심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신학을 하면서 감사한 것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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