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정말 대단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여기에는 시간의 시작과 공간의 시작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공간안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여기서 신학적, 철학적인 이야기를 집어 넣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쉽게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 가운데 사람을 두셨을까요? 그리고 아담, 하와 둘만 영원토록 살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좌우지간 태초부터 공동체의 개념이 존재하게 됩니다. 삼위이신 하나님께서 그 삼위의 조화로운 교제를 인간 세상에도 공동체 안에 표현하십니다.
 즉, 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에 대해 제한적인 부분만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철저히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혼자 신앙이 커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 기도하고 신앙이 자라갈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신약의 바울서신의 대부분은 다 공동체의 성장을 아주 애절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공부를 정말 좋아합니다. 혼자 하는 성경공부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경 공부를 좋아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가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수십배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은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시고 광활하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됩니다.

신학도 그런 맥락에서 저는 봅니다. 저 혼자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전, 깔뱅을 공부하면서 깔뱅이 만났던 하나님을 듣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바르트 등 수 많은 신학자들과 그의 사상들을 통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을 듣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상이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보는 것과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나누어도 그 안에 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류시킵니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성경에 대한 공부가 선행 또는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 서적을 읽을 정도의 정성이나 그 이상으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깨닫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에의 추구가  신학서적이나 위대한 신학적 사상가들에 대한 열정을 낳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에 대한 열정은 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신학자들과 대담을 하기 위해선 나도 그 신학자들이 만난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생각들을 경험하며 그 신학자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난 그 넓고 깊으심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신학을 하면서 감사한 것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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