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만 위주로 한다는 세계관(가치관)의 위험성
 오늘날의 많은 크리스챤들이 듣고픈 말이 신앙 좋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은 신앙적인 부분들이 좋다 안 좋다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지만, 적어도 외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좋다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신앙의 좋은 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에서 그 외형적인 무언가를 가지길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외형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은 어느 정도 사상이나 행동에 있어서 공부를 많이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과거보다는 약간은 긍정적으로 많이 안다는 생각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삶입니다.
 얼틋 보면 굉장히 좋아보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무엇이든지 하나님만 바라보겠다. 그 외의 다른 것은 필요없다 뭐 이런식의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하나님 위주로만 살겠다는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보면서 그 외에는 다 소용없다고 말하는 가치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배제한 관점이며 참 위험한 요소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은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해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말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 지향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만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있다고는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전 살면서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이 무례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물론, 크리스챤이라고 해서 특별이 더 무례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무례함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이 무례함은 은연중에 내재된 협박과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분명 그들과 대화를 하면 그들만큼 신앙 좋은 사람을 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지향적입니다. 그렇지만, 따뜻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사람안에 인간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속한 것이라는 어떤 영역과 그렇지 않은 어떤 영역으로 나누며, 하나님 안에 속한 영역이라고 여기는 부분에서만 활동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얼마전 모 학습법에 대한 어느 전도사의 강의를 우연히 들으면서 굉장히 실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인본주의적 학습법을 쓰레기 같다고 표현하면서 신본주의적 학습법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내용인즉슨, 신앙이 좋아보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적은 그런 유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좌우지간, 제가 마음에 실망했던 것은, 쓰레기 같다는 표현이 너무 거슬려서 싫었고 다음은 그 분 안에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학습방법은 다 쓰레기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인 측면을 사용해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모든 것들을 통하여서 역사를 주관해 오셨습니다. 어떤 신본주의적인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것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 세상까지 확장되지 못한 것은 마치 하나님을 위한 유토피아적 세상을 만들고 그곳에서만 역사하시는 제한된 하나님을 만드는 위험한 일입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인간을 통해 다양하게 나오는 것들이 나쁜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과 배제되는 곳, 도덕적, 영적인 측면들이 붕괴되는 곳으로 사용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안에서 이웃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발현되는 것을 올바른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면도 이런 면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안에 무너진 영역들을 회복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하나님 위주로 하는 세계관인 것입니다.
하나님 위주로 한다고 하면서, 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이런 행동들은 진정한 하나님 위주로 사는 삶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주변을 관찰해 보십시요.
우리 주변에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을 한 번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무지 좋은데, 왠지 이 사람만 만나면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해 보지는 않으셨는지?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서 이 부분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요.
*** 이웃을 향한, 인간을 향한, 세상을 향한 사랑(하나님안에서의)이 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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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어떤 신학적인 견해도 배제하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위의 모습은 내가 *국에 있을 때의 예배 모습이다.
이 지역은 인도의 타밀지역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알다시피 인도사람들은 힌두교적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힌두교라는 것이 종교적인 면에 많이 초점을 맞춘 것일 수도 있지만, 인도 사람들의 문화적 삶을 지칭하는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이 그것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쳐 생활적 측면에서 종교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힌두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그들의 문화적인 삶의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이나 방법대로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부분들은 미국이나 유럽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그보다 하위 단계의 지도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접근하는 정복적 방법과 비슷하다.

내가 이 예배에 참여했을 때, 위의 분은 성찬식을 야자(코코넛)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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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셨다.
야자 열매 밑에다가 흰 대접을 갖다놓고, 야자열매를 들어 보여주며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망치로 열매 중간을 탁 때렸다.
그랬더니 열매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 있던 물이 팍 쏟아져 나왔다.
이 모습에서 느껴졌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피흘리신 그 모습이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피가 흘러나왔던 그 모습이었다.

야자 열매 안 속에는 하얀 살이 있었다. 그 살을 떼어 주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머릿속으로 한 번 위의 장면들을 상상해 보시면 좋을 듯 싶네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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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에서 처음에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이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바빠서 하나님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들이 별로 없어서 집중하지 못하고 듣질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 음성 듣기에 대해 훈련받다 보면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며, 또는 예언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재미를 느끼게 되며 그 경험들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더 자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단계들이 지나면서 부작용도 생기게 된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사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갈 때, 올라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는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아주 심하게 비약을 하자면 점치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을 보러 다닌다. 점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명확한 지침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 듣기가 이런 형태가 되면 안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안 하시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이시다.
우리의 문제로 인해 하나님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기도제목으로 하나님을 강요하는 등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 듣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매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듣고 말씀안하시면 그대로를 감사드리는 것이다.

올바른 하나님 음성 듣기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것 자체가 벌써 조건부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두는 사람은 그냥 하나님 자체로 만족하며 하나님께 모든 상황 속에서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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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와서 한 학기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는데,
신대원 와서 가장 복된 것 중의 하나는 박동현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교제를 가질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만나서 개인적 교제를 가지고 싶다.

첨부 파일은 사경회 때 특강을 하셨던 박교수님 원고이다.
박교수님 홈페이지( http://dhpark.net/ ) 들어가도 다운 받을 수 있다.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했으니, 이 곳에 강의 했던 원고를 올려 놓아도 큰 실례가 아닐 듯 하는 희망을 갖고 올려 놓는다.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박교수님 홈페이지에 들어가셔서 설교 원고나 기타 다른 자료들도 읽어보시면 좋을 듯...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마 한번쯤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해 놓으셨고, 원하시는 비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봤을 것 같다.
교회에서도 비젼에 대해서 많이 가르친다.
너를 통해서 열방이 변할 것이다. 너는 정말로 소중한 존재이다. 너를 통해서 한국 사회가 변화될 것이다. 너에게 정말 멋진 배우자를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 등등...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비젼은 우리의 비젼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뭔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큰 성취적인 것들이 일어나길 원하고 자신이 그 통로가 되길 원한다.
하지만, 비젼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것이 참 대단한 것이다라고 하면 그것이 큰 것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를 통해 열방이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작은 것이라고 하시면 그것은 작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이 자꾸 자신의 머릿속에 뭔가 큰 것을 설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큰 비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자기가 뭔가 작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또는, 자신의 일상 생활의 반복적인 일들을 하게 될 때 그것에 답답해 하고 뭔가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주시길 원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며, 그분의 뜻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다.

비록, 일상 생활에서 영향력을 많이 미치지는 못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뜻을 찾으며 감사하고 그것을 세상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보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올바른 관점인 것 같다.

 
하나님 오늘 뉴스를 보다가 남북 철도길이 일시적으로나마 열리게 된 걸 보았네요.
이걸 보면서... 제 머릿속에 스쳐갔던 것은
얼마나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남북이 하나되길 기도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보기도 모임에서 부르짖는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과
항상 남북 통일이 기도의 제목이었던 수 많은 한국 교회들...
드러나진 않지만, 갈려진 남북의 현실에 가슴 아파하면서 골방에서 기도하며 눈물흘린 수많은 이땅의 기독인들...
이 모습들이 하나 하나 스쳐가더군요.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움직여가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무릎꿇을 수 밖에 없고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나라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런 희망의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 적실 수 있는 감동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들의 통로이다.

따라서,
난 환경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이 말은
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난 어떤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지 말고 학생의 위치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이다.
내가 소그룹을 인도한다고 하여도, 난 그냥 그곳의 일원일 뿐이지 리더는 아니다.
리더는 성령이시고, 성령께서는 모든 멤버들의 입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신다.
따라서 나는 내 입을 성령께 맡기고, 다른 멤버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소그룹의 모습이며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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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보면, 신앙 훈련을 많이 받았다는 사람 중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훈련을 많이 받았으니까 그만큼 많이 안다는 의미의 생각들...
그리고 교회 나온지 오래 안 된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역사들을 제한할 소지가 충분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각 개인이 훈련받은 것과 성장 과정 속에서 연단시키신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께 순종한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멤버들을 하나님의 통로로 여기며
그 멤버들에게 서로 겸손과 온유함으로 배워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자가 되는 것...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보면, 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어디에서 훈련받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하나의 권위처럼 내세우는 경향이 많아 자랑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전체 몸의 한 부분으로 조금 더 제 기능을 하기 위해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지, 머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몸의 부분들에 비해 우월한 것도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머리고 우리는 모두 몸의 한 부분이며 서로가 맡은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곳에서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 봅니다.

그렇지만 그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본문은 여호수아 1:1-9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면 우리에게 많은 의미가 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있으면 그냥 좋겠다 이런 느낌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나 타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부모님 두 분과 같이 못 지내는 경우도 있고, 또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는 절망감이 들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런 마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봐도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인 하나님의 그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굳이 집어 넣지는 않겠습니다.
여호수아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죽은후...
모세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어떤 존재 였을까요?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상태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 길을 헤쳐 나온 지도자였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많은 기적들을 보여 주셨고,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친밀했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에게 나아와 재판을 요구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께 기도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 가운데 넘쳤고 그들은 광야 가운데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반역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지만 같이 고생하며 모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봤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라는 사람은 큰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에서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의지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 훌륭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아마 상실감도 크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끝까지 그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두려움 등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첫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런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니까 두려워 말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천 지침을 주십니다.

아무리 어떤 말들이 좋아도 그 말들을 내 안에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들이 우리 가운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실천 지침을 주셨습니다.
1. 강하고 담대하라. (마음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신 거죠.) (1:7)
2. 율법을 지켜 행하고 그대로 따라함. (율법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 가운데 어떻게 승리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가 기록되어 있죠. cf.물론, 여기서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이죠. (1:9)

세상에서 익숙한 곳에서부터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우심을 의지하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용기와 힘을 가진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이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삶 이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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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사람들이 이런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이야기...
우리는 주변에서 참 안타까운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식을 보고 싶은데 자식과 떨어져 지내는 이야기들... 특히,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자식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데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을 보며 극심하게 울부짖는 부모의 모습들...
이런 것들을 대하면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생명 나무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안에 아담과 하와를 두시며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에 대한 명령을 어깁니다. 창세기 2:17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느냐? 이게 실제로 존재했느냐라고 따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주관심사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이 반역했고,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죄를 어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3:5절에 뱀(사단)이 속였습니다.
어떤 것을 미끼로 하였냐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여 속였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악과는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상징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좋습니다. 누구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그 보호자 아래서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호의 테두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자였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을 떠나려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관계의 단절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지옥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반역의 마음을 갖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정말 너무나 화나고 멸하시려고 했다면 가죽옷을 입혀서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3:21

하나님이 왜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보낼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3:22 에 나옵니다.
1. 죄를 범해서
2. 생명 나무 열매도 먹고 영생할까봐...

하나님은 인간이 영생 하는 것에 대해 시기하시기 때문에 쫓아내셨을까요?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영생나무 실과를 먹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죄 상태에서 영원한 상태로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원토록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과 함께 하며 모든 것을 누리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가 없기 위해서는 죄에 오염된 것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 사람은 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이 옛 사람이 죄와 함께 그리스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에서 깨끗해 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로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어떤 분은 그건 추측이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근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게 된 자, 죄가 사하심을 받은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 22: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의 의미는 원어에 비해 다소 추상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없어졌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에 따라 생명 나무 실과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하는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꾀에 넘어가 죄로 타락한 우리들에게 이런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적용점들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계속 거하는 것은 사단에게 지배 당하며 하나님과 단절되는 지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의 결과들이 오늘날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단은 우리를 멸하려 하고 죽이려 하고 속이려 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생각들이 너는 쓸데 없는 존재다. 죽어버려라하고 유혹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의 물줄기가 생수의 근원에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죄 속에서 하나님과 단절되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면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의 죄된 옛사람이 죽으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해 얻어진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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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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