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어떤 자매로부터 국제 전화가 왔었습니다.
외국 생활에서 받는 인종적 편견에 대해 나누면서 어떤 경우에는 열등감과 어떤 경우에는 우월감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가운데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외국에 있다보니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어서 도대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갈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인들에 의해 무시받는 상황 가운데에서 때로는 한국 사람으로 자부심을 드러내고 싶기도 했다고.
또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 사람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한국 사람으로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월감을 벗어나 하나님 앞에 동등한 자로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열이라는 경쟁 논리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몸의 부분들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가운데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관계의 깨짐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지혜가 있어서 능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성령의 다루심 가운데 서로에게 위탁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을 통해 가르치시는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있지요.
어느 순간 자기 존재의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를 취하며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본다면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으며 상대의 말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외모로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은 곧 소속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적으로 백성으로의 삶을 사는 실천적인 지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소속이 되었다고만 여기고 실제로는 소속이 안된 사람으로 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때,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섬김 가운데 기쁨과 생명을 더욱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며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게 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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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09005

위 링크 기사는 어느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여관에 장기 투숙하던 학생인데, 죽은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죽은 아들과 함께 1주일정도 있다가 나가서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돌고 가슴에 맴돕니다.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3월 서울 구로구 B초등학교에 입학한 김군은 5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간다"며 천안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한달이 채 안된 6월초 다시 B초교로 돌아왔다.

김군이 머물던 월 30만원짜리 여관방은 2평 남짓한 욕실이 딸린 방으로 더블침대가 방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비좁았으며 취사도구.옷장 등 기본적인 가재도구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28일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김군의 시신이 발견된 방에는 여행용 가방과 비닐백 서너개에 담긴 김군 모자의 옷가지와 책.학용품만이 남아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기본적인 식료품조차 없었다.

김군의 시신을 발견한 여관 주인 방모(64)씨는 "어머니가 김군을 직접 등하교시켰고 나머지 시간에는 거의 방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군의 어려운 환경을 학교 등 주위에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김군은 늘 밝고 씩씩했다.

항상 깔끔한 옷차림에 반에서 가장 뒷줄에 앉을 정도로 키가 크고 건강했던 김군의 표정에서 어두운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담임교사 고모(53.여)씨는 김군에 대해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밝고 씩씩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성적도 중상위권이고 과제나 준비물을 빠뜨리는 일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교육열도 커 가정환경이 그토록 어려울 줄 상상도 못했다"고 전했다.

고 교사는 또 "(김군이)15일부터 결석을 했지만 어머니와 직접 통화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아프다'고 해 그런 줄만 알았다"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스의 글은 이 사건의 다른 기사 일부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작은 여관방에서 지낸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날마다 생활을 했을까요?
학교에서는 밝고 씩씩하게 지냈지만 밥 한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황을 가지고 지냈다는 것이 슬픕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들을 보면 눈물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먹일 수 없고 아마, 가슴이 너무나 저리도록 울고 또 울고 그랬을 겁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죽고...
얼마나 슬펐을까요? 평생 한으로 남겠죠.
그 슬픔이 그를 1주일동안 죽은 자식을 바라보며 있게 만들었고 결국은 나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겠죠.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가진 여자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일일까요? 직장하나 제대로 없다면 더더욱 어려울 겁니다.
그 아이도 얼마나 불쌍한가요?

이 모든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겠죠.
우리들의 무관심과 부족함들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며칠동안 이 사건을 계속 생각해 보며
그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위 박스의 성경 내용이 이 사건과 비슷합니다.
하갈이 자식과 함께 사라에게 쫓겨나서 광야에서 방황할 때 물이 없어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소리내어 서럽게 웁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갈은 어미로써 어떤 일도 자식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이와 떨어져 앉아서 서럽게 서럽게 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이의 어려움들 슬픔들을 들으시며 아이의 엄마인 하갈에게 생명의 약속을 주십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리고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보게 하시고 물을 마시게 합니다.

정말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생명의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큰 아픔을 가진 그 어머니에게도 하나님이 위로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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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 드리면서 옆 자리쪽에 눈이 안 보이는 형제님 한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혼하신 형제님인데 참 잘 생기셨습니다.
제 안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눈이 안 보이시니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형제님의 아내 되시는 분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그 자매님을 볼 수 있으니 그 자매님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있죠.

그 형제님의 마음속에 많은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다.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간절히 원할까요?

영화를 보면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그래서 더욱더 그리워하고.
또는 이별하게 되어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직감하면서 안타까워 하고...

참 마음 저리는 사랑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비늘같은 것이 있어서 그 사랑하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그 얼굴 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내가 사모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실까? 라는 생각에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또는 성령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의 예수입니다.
눈이 안 보이시는 형제님도 자매님을 촉감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가슴 에리는 모습이 있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히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도 단순히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통한 뿌연 모습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을 통해 우리는 기대합니다. 언젠가는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그 분과 얼굴을 맞대고 사랑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소망입니다.

[고전13: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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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웬일인지 몰라도 그냥 힘이 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들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여건이 좋아지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기숙사 계단을 오르면서 불현듯 왜 이렇게 힘이 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은
저를 위해 사람들이 기도해 주시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과연 기도가 무엇일까요?

오늘 하루 동안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삶을 나눈 사람들이
한결같이 해 준 이야기가 기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저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어느 한 분이
기도란 단순한 대화 이상을 넘어서 나를 향한 능력과 보호막이라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는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관계 이상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덮고 세상을 덮는 힘이라는 것을요.

이전에도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 왔지만
새삼스럽게 많이 느껴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저에게 기도의 이 속성을 실제적으로 가르쳐 줄 적절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잠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봅니다.

하나님!
우리 가운데 주의 능력으로 덮으시고
세상의 무너진 것들을 회복시키시고
아픔과 절망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희망과 기쁨과 생명이 넘치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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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철을 타고 학교로 오는 길에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의 사건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 뜻에 합당할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내가 있는 곳의 상황은 어떤 큰일을 하기에는 턱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일상 가운데서 그냥 그렇게 살기는 싫고...

우리 안에는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한국의 경쟁적인 사회 구조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무언가 성공적인 일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문 기사를 봐도
누가 어떻게 공부했더니 이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
누가 이렇게 노력했더니 엄청 부자가 되었다 이런 기사들 일색입니다.

또한 교회내에서도
누가 이렇게 기도하고 꿈을 품었더니
이렇게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보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얼마 안되는데, 나도 큰 일을 하고 싶은데...
라는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무리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마 14:16)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합니다. (마14:17)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
어찌 수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무리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4:20-21)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껏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등의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크게 못 이루는 작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의 작은 몸짓으로도 실천으로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하도록 이끄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냥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도 하나가 전세계의 부흥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하시는 주체는 우리의 큰 사역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는 태도에서 벗어나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분은 전임 사역자를 하시고 싶으셨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여
직장 가운데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내가 전임 사역자를 했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 때문에
직장 가운데 만족을 느끼고 있지 못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부르신 뜻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그 분이 직장 가운데 있어서, 그분의 작아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그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직장 안에 우리 나라안에 세계 안에 행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없이 크게 확장시키십니다.
왜 굳이 작은 것일까요?

그것은 작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고 하나님께 더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약할 때 곧 강하게 됩니다. 그 강함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뿐이니이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명이나 되었더라.

신앙이라는 것이 좋다 안 좋다를 판가름 하기는 어렵지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신앙 생활에 단계를 굳이 두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아기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있죠.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들로부터 나이가 많으신 분들까지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발달 단계가 있고, 그 단계에 맞춰 정서적인 발달이 요구됩니다.
아직, 밥도 잘 못 먹는 아기에게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요할 수 없겠죠.
그리고,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제 멋대로 돌아다니는 아기에게
너 왜 그렇게 상황 판단을 못하니? 가만히 점잖게 앉아서 있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어색합니다.

다 상황에 맞는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뭔가 앞뒤가 안 맞겠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그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말을 해야 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욕심에 맞춰서
신앙 생활은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틀을 만들어
미성숙한 아이 같은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황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직도 느껴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의 하나님이신가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는 자라면
다음 단계의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어찌보면 말할 수 없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 싶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주변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무엇인가 어떤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얽매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신앙을 그런 식으로 접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신의 욕심을 내려 놓고
과연 자신에게 필요한 신앙의 단계가 무엇인가를 점검해 보며
차근차근 하나씩 성령께서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하나님 저를 확 바꿔 주십시요. 이런 기도를 자주 했었는데,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이런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권자 되시며 저를 빚어가시옵소서.
그것이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하나님께서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성령께 맡기며 조금씩 변화되어야 하는 삶이
자신이 주인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되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어린아이대로,
청년일 때는 청년의 도전을,
아비일 때는 아비의 도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새, 대학생들을 보면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을 열정적으로 드리고, 눈물도 흘리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정적인 것 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조용한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젊은이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빚어가시고 사용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열정에 대해서 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중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에 감격하는 그것을 보며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이 왜 부족하냐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신앙 생활을 오래하고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일 때는
아비의 품성을 가지도록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마땅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희생하고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좀 우스꽝스럽고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저는 큐티를 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약간의 위험성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말씀 묵상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말씀 묵상의 방법이 우리에게 은연중의 위험을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예배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은혜를 만들어내지 말고 하나님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예배 인도자로 섬겼습니다.
정말 중요한 예배는
회중들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불붙는 떨기 나무에서 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예배의 분위기나 감정 적인 것에만 자신을 맡겨 은혜 받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말씀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취해서 적용점을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큐티를 보통 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을 여러번 읽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묵상한다음
하루에 적용할 점을 찾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가운데 맞는 말씀을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하려고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말씀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면
그 말씀 묵상은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러분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적용점을 만들지 않아도
길을 가는 도중에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서 여러분을 이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창세기 1장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는 것을 공부하고 묵상했습니다.
저는 어떤 적용점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 인간을 향한 존엄성의 부여를 느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데
때가 꼬질꼬질한 노숙자 분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그분에게 주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분이다.'
그 노숙자 분이 인사할 때, 저는 더 허리를 숙여 그 분을 존경하며 인사하였습니다.

말씀이 사역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적용점을 찾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적용점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은혜를 억지로 자아내려는 묵상은 바른 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만으로도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마치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알지 못해도
길을 가듯이
우리의 삶을 말씀이 스스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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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에서 느낌표를 봤습니다.
베트남을 찾아가서 어떤 소녀의 심장병을 고쳐주려는 이야기인데
참 감명깊었습니다.
그 소녀는 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심장병을 갖고 산다네요.
항상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감명을 줍니다.
왜냐면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도처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죽음의 그늘에서부터 벗어나 생명을 주는 모든 활동은 가치있고 참 소중한 일인 것 같습니다.

프리덤 라이터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로 다른 인종끼리의 갈등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치며 남을 죽이는 환경 속에서 자랄 수 밖에 없는 아이들.
생존이 가장  큰 그들의 당면한 문제인 그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이라는 것과 친한 그들.
그들에게 한 여교사가 삶의 희망을 줍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생명의 희망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들이 그 교사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변하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의 구절이죠.
어둠의 세력은 죽이고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죠.

저는 이런 생명을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작은 제 주변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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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정말 분명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간은 제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떤 계층에게는 그 말씀이 정말 많이 다가오겠지만은,
어떤 계층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성경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해석에서 열려져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답답한 일이지만
구원의 소식을 성경을 통해 모든 계층에게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자기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는 위험이 따르며
하나님의 천국의 확장성을 제한하는 한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태까지 배웠던 것의 고정관념에 묶여 있지말고
성경을 직접 붙들고
성령 하나님의 조명아래 기도하면서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빛 아래서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며
각자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을 일깨워 주실 것이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드시고, 그 고유한 개성을 주신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도 각자에게 가장 맞게끔 그러면서도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시하실 것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다른 면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사랑의 광대하심을 다시한 번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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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취재파일 4321을 보다가
나이드신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 방송 됐다.
그 취재 동기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신의 생활비를 벌고자 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였는데,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루면서 또한 그 세대들의 인생을 다루었다.

본인들은 자식들을 키우면서 배우지도 못하고 그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악착같이 돈을 버시고 자식들을 위해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병에도 불구하고 돈 벌이도 되지 않는 한달에 단돈 20만원 정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시는 그 할머니들...
그 돈들을 또한 자신을 위해서 다 쓰지도 않고 자식 이름으로 꼬박꼬박 적금을 드시는 그 할머니들...

이러한 모습들이 한국의 어머니들에게서 나타나는 사실이 못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부모님에게 효도는 커녕 부담만 드리고 자식 노릇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저를 위해 그 분들의 인생을 희생하셨는데, 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 분들은 본인들이 먹고 쓰는 것들도 아까워하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퍼주시는데, 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제 인생도 제대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며,
저만의 이기적인 생각과 결단의 길이 제 주변에 많은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이 분들의 삶을 위로하시고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들이 늘 넘치게 해 주시구요,
건강하도록 붙들어 주세요.
이 땅의 많은 부모들에게 더욱더 힘 주시고, 그들의 희생의 삶, 섬김의 삶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값진 삶인지
많은 자녀된 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항상 감사하게 하시고, 더욱더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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