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 즉, 아브라함, 다윗 등과 같은 사람의 삶이 핵심이 아닌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창조에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멸시하고 잊어버리고 자기 스스로의 세상을 만드려고 하나님의사랑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과정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무슨 자기의 의나 자랑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아무런 자격이 없고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읽게 되며 무슨 적용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적인 사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임을 알게 된다음 삶이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길 원하는 사람은
은혜의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맡겨 우리 안에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길을 찾기 때문에 그것이 짐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롭고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부담이 되시고 어려움이 느껴지시고, 자유가 없다면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삶을 제자의 삶으로 놓는 것에 대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성경의 메세지에 대해 삶의 적용점만을 찾는다면 큰 오해를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체험하면서 나오는 자발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주는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자발적인 반응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름아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다루어 가시도록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성령께서 자신의 삶을 다루도록 내어 드리며 그 삶의 변화 아래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계속 그런 논리를 펼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찌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에 빠져들고 거짓 메세지에 넘어가느냐?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이럴 수는 없다.
이런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이런 큰 맥락에서 바울 서신을 보아야지
윤리적 적용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울 서신이 윤리적 적용을 말한 근본적 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을 따르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SBS에서 아이 4을 돌보는 아줌마인 멜라니가 생각납니다.
몸빼 바지를 입고 와서 강의를 하는데,
강의 시작전에 두 손을 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그 기쁨과 평안에 가득하여 하나님을 전하는 모습.
갑자기 떠오르네요.

멜라니와 그의 남편 릭은 말레이시아 페낭에 와서 베이스를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을 양육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역이 10년인가 되었을 때인가, 기념하는 자리에서
한 스텝이 You raised me up 이라는 곡을 그들에게 불러 주었습니다.
아래는 가사입니다.


Westlife - You Raised Me Up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내 영혼이 힘들고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이 밀려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할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나는 여기에서 고요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가사가 참 아름답지요.
멜라니 부부는 이런 가사를 들을 만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함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힘이 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멜라니 부부처럼 하나님에게 신실하며 하나님을 전하는 기쁨 가운데 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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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새 읽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서 짧은 시간내에 책을 다 읽곤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빨리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글을 하나씩 읽으면 더 깊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박동현 교수님의 세상에 대한 통찰과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 말씀 속 삶의 원리를 쉬우면서도 깊은 반향을 일으키도록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읽어보시면 입가에 따스한 웃음이 스며나오며 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느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 하세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469690

그리고 아래는 글 중의 하나를 옮긴 것입니다.

2001년 1월 26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남들과 대화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장사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지 않더라도
반드시 예배당이나
기도원이나 골방에 와 있지 않더라도
내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면서 말하고
기도하면서 글 쓰고
기도하면서 걸어가고
기도하면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에게서
곱지 않은 말이 나올 수 없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 쓰는 사람에게서
거짓된 글이 나올 수 없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없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의 이익만 좇을 수 없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남을 해칠 수 없습니다.
친구 로버트가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덴버 ywam에 총격사건을 일으켰던 사람은 놀랍게도 2002년 덴버 ywam에서  dts를 하던 형제였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 안 좋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비 메탈을 특히 좋아했던 그 형제는 훈련받는 동안 사탄worship 곡들을 부르는 등의 행동을 하여, 간사들이 협의하에 형제의 훈련을 중지시켰답니다.
그후, 그 형제는 4년동안 그 마음속에 분노가 있었는지 이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답니다.
denver 베이스에서 2명을 죽인뒤, new life church로 이동하여 사람을 죽이다가 교회 safe guard에 의하여 총을 맞고 쓰러진다음, 스스로 총을 자신에게 쏘아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제 마음 속엔 참 아픔이 있었습니다.
쓴뿌리라는 것은 이토록 가슴 아픈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저도 쓴뿌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통로를 통해 쓴뿌리가 은연중에 많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쓴뿌리가 이유없이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하거나, 특정 계층에 대한 더욱 더 많은 불만등을 표출하는 형태로 나타나곤 했죠.
물론, 이 쓴뿌리가 저의 문제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받음에 의해 이 쓴뿌리가 자라게 된 것입니다.

치유 사역에도 가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쓴뿌리가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직장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쓴뿌리가 되어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쓴뿌리는 결국은 자신에게 피해를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냐면, 쓴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된 형태의 사랑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리더들이 이 쓴뿌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양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자신의 쓴뿌리는 힘든 상황 속에서 가시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가시가 다른 사람을 찌르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이 쓴뿌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
나의 쓴뿌리가 무엇인지를 보면서
예수 보혈의 피로 덮고, 성령의 불로 태우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럴 때, 우리 안에 사랑이 넘쳐나게 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사랑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9개월동안 말레이시아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난 참 친한 친구를 만났다.
자신을 로버트라고 소개한 Robert.
맞지도 않는 영어를 써가며 나는 그와함께 교실에서 토론도 해 가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쁨이 되는가에 대해서 나누었다.
말씀안의 교제라는 것은 그렇다.
무언가 다른 일을 하진 않아도 그렇게 말씀 안에, 하나님 안에 정이 들어간다.

그 로버트가 한국에 왔다.
토요일날 저녁을 먹으면서,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말레이시아를 떠날 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와서 울었다고 그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그 로버트를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우린 한국에서 만났다.
01234



주님이 우리에게 서로 격려하며 말씀하실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었다.
둘다 요새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정확하게 같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그 말을 둘다 하면서 얼마나 감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지...

그렇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서로의 장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 은혜...
비록 앞으로 볼 수 없을지라도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분명한 우리 가운데 신뢰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각자 있는 곳에서 증거하는 것이다.

로버트를 숙소로 데려다 주며
혼자 재워야 하는 마음 아픔이 있었다.
토요일 밤에는 눈물이 안 났는데,
오늘 집에와서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주의 축복과 사랑을 전한다. 로버트...

아래 동영상은 로버트의 일상을 연출한 것... 단지 연출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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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말고사가 끝나고 자유로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지만요...
오늘 나눌 이야기는 사도행전 5:1-11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얼마를 베드로 앞에 가져갑니다. 소유를 판 돈의 일부를 바치면서 마치 전부인 것처럼 속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질책하면서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3절,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9절과 같이 말하며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부분을 사도행전에서 읽을 때마다 많은 곤혹감에 사로잡혔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침 채플에서도 이 부분을 언급한 교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도대체 이 부분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보곤했습니다.

 기숙사 방에서도 룸메이트들에게 경건회를 하면서 도대체 이 부분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생각을 나눠보라고 했었는데, 명확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거듭나누면서 발견했던 사항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 부분은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난 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다면 어느 정도의 강력함이었을까요? 이것이 이 부분을 이해하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여서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고, 기적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공회 앞에서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쯤되면 성령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강력한 능력아래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5장의 내용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생각을 해 보십시요.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강력하게 나타났을 때, 이 성령의 공동체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었을까요?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었겠죠.
우리가 교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사람의 행동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도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하면서 그 행동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쉬운일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런 일을 행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소유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도 이러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이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을 시험했다는 말로 그들의 행동을 규정합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떤 권위자의 메세지에 반감을 갖거나 비판의 말을 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느니 이런 말을 쓰는 곳도 있습니다. 위 상황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것이죠.^^;;;

좌우지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나타나는 정결함, 부의 나눔, 등의 성령의 불로 정결케 되는 상황 가운데 모든 사람이 변화되는 그 변화의 흐름을 거절하는 곳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그 변화성 앞에 사람이 서 있다면 결과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성령의 이끄심 아래 변화되거나, 아니면 거스려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재가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임재 가운데 예수 보혈의 피로 정결케 되어 하나님과 화목되거나 아니면, 멸망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성령의 강력한 임재 앞에 서 있게 되었는데, 그 흐름 가운데 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삶이 성령에 순종하여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한 이유 그 자체보다는 더 큰 맥락에서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어느 것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어떻게서든지,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성령이신거죠.

사람들이 여러 어려운 가운데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복음 전달의 의지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은 이토록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 앞에서 감히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사람을 살리시고 생명을 주시지만, 그 반대도 행하실 수 있는 위대하고 광대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엄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은 어마어마합니다.

이 성령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이 다루어지고 변화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고 우리의 삶이 정결하여 지며, 거룩해 지는 것은 우리 가운데 풍성함과 기쁨과 소망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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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서울에는 눈이 두번째 내렸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온통 새하얀 옷을 나무들이 입고 있더군요.
너무나 하얀 모습이 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거리는 얼음이 살짝 얼어 있더군요.
사람들이 무척 조심하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저도 학교 가는 길에 무척 조심스럽게 갔죠.
넘어질까봐요...

요새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주거나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상처주는 것은 있을 수 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니 상대방이 상처 받는 것은 하나님이 다루실 문제이고
그런 말 때문에 상처 받는 다면 뭘 하겠는가?
이런 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면 어떤 말로도 위의 말들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품으시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겪으시면서
찾아다니시던 분이셨으니까요...

우리가 너무 길을 쉽게 달려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길이 빙판길임에도 말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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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전쟁이 끝난지 4년 뒤인 1957년 12월.
미국신부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1930~1992.사진(中)에서


이 사진들을 보면서 6.25 세대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리고 가난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도록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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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생의 아픔을 보여주는 한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유다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7: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27: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에게 기대했던 일들이 벌어지지 않자 마음에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왜 예수는 이런 답답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는지.
그래서 그런 답답함과 원망들이 마음에 쌓였겠지요.
이런 것들이 분노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자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의 무리들과 신호를 짜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넘겨질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릴 때 예수님은 귀를 고쳐주시면서 폭력적인 일을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냥 그냥 잠잠히 끌려 가십니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가룟 유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차라리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고 흥분하시고 뭐라 하시면 아마도 마음의 죄책감을 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나쁜 행동을 보시고도 그냥 끌려가십니다. 그냥 가룟 유다의 일을 행하라고 하시면서 어린양처럼 끌려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사랑과 안타까움을 갖고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바라보셨습니다.

이 사건 후에 가룟 유다는 아마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고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책감이 들었고 스스로 뉘우치게 되었으며 그런 아픔들로 인해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7:3-5)

예전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녀를 죽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살인자를 바라보며 용서합니다.
그런 행동들이 살인자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 일으킵니다. 차라리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지 왜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용서할까? 이런 행동이 괴로워 이 살인자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용서를 빌면서 말입니다.

와호장룡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릅니다.
장쯔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입혔던 모습들을 나중에 깨닫고 혼자서 높은 산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산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 마음속에 자신 때문에 상처 입고 해를 당했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의미를 담고 어렵고 눈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자유로와지려고 합니다.

이런 비슷한 심정이 아마도 가룟 유다에게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가룟 유다를 쫓아내거나 뭐라고 하신 적이 없으시고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성찬을 하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끝까지 대하신거죠.
심지어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 가실 때도 가룟 유다에 대해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눈은 어떤 눈으로 유다를 바라보셨을까요?
유다를 그토록 죄책감과 뉘우침으로 몰아넣었던 예수님의 그 눈은 사랑의 눈이었을 겁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유다는 예수님이 왜 순순히 죽음을 선택하셨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유다같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아오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참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도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아마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였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기 원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소망되시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생명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 불쌍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우리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 속에는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셔서 죽을만큼 괴로우십니까?
그럴 때 그것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가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예수 그리스도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은 계속 우리를 향하시며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십니다.
그 눈이 계속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삶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시편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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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설교문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 설교문을 만들어 보게 되었습니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겪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난들이 우리에게 닥쳐오기도 하고, 그런 상황들이 우리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여, 한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머리를 양팔에 파묻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울음이 더욱더 가슴 아픈 울음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거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에서나 혹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공격받을 때 다가 오는 울음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울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며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견디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상황적 어려움의 고난은 어느 정도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정체성의 근원되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다가와서 하나님안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면 이 슬픔은 깊은 영혼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시편은 단순한 인생의 아픔이나 어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우리에게 그 정체성이 공격받는 상황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인생들의 아픔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상황이 힘들어서 느껴지는 아픔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공격받게 되어 느껴지는 배가된 인생의 아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 3편은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격받는 상황 속의 아픔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 시편에 나타난 비슷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다루어지게 됩니다.

 우선, 시편 3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상황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사무엘하 15:14-17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면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로 향합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 가운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특히, 사무엘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그 상황이 힘들었는지, 울면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상황이 단순히 현실적으로 힘든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산 모습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바로 이 상황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아픔, 즉 정체성의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상황이 힘들어서 절망하고 울기 보다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유일한 희망으로 붙들었던 그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다윗의 울음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비록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긴 했지만 그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바로 계속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과 어려움들이 닥쳐오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의 절정이었던 부분은 바로 겟세마네에서의 슬픔의 기도였으며, 십자가에서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속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깊은 아픔이 있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현실적 상황의 아픔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비롯된 배가된 아픔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다윗의 삶 속에서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숱한 시험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냈으며 이제는 시험이 끝났다는 생각,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순탄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때, 다윗의 평생의 삶도 광야 이후의 평안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광야가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깊은 인생의 슬픔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들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혹시, 40일 광야 이후의 삶이 이제는 광야의 시간을 벗어났으니 하나님이 나의 삶을 평안하게 하시고 내가 이만큼 견디어 냈으니 나를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끄시겠지 이런 생각은 없는지요?
 일정 기간의 광야 시험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은 광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이 시험은 또 다른 종류의 광야인 심화된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계속 도전을 받는 시간이며, 반면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붙들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40일의 광야 시험으로만 모든 연단의 과정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이후에도 그런 과정이 있게 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쳐오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흔들림 속에서 낙심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광야의 삶을 통해 더 큰 연단과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더욱더 확고히 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며 진리를 분별하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3편은 노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편 1절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이 고백까지는 일반 사람들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이 부분에서는 보편적인 상황의 아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그 상황 자체가 힘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 사람에게 그리 견디기 어려운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와 우리 편이 되신 다는 생각이 우리를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상황 가운데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며 이겨내는 것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적 어려움은 그 자체로 힘들 수는 있지만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절로 진행되면서 어려운 현실 상황의 아픔은 다윗의 영혼의 아픔을 자아내는 곳으로까지 상승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 부분에서 아마도 다윗은 많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생 신뢰하고 사랑하였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사람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은 평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상황의 처절한 아픔 속에서의,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일순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생각이 들며, 깊은 영혼의 절망감 속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며 따라가는데, 상황의 처절한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주의 사람들로부터 너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보면,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기 때문이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경험이 없으셨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긴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상황의 어려움 가운데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에 대한 어려움 속에서 드는 괴로움 말입니다.

 3편 2절 이후에 셀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셀라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니 셀라는 시편등에 나오는 음악용어로, "높임", "올리움", "중지"라는 뜻의 '살랄'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셀라는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음악적인 지시어로서 "그곳에서 한 박자를 쉰다",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라는 용어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서 잠깐 쉬어가게 만드는 이 셀라라는 표현은 상황의 아픔을 잠깐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호흡인 듯 싶습니다.

 시편 3편 2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의 공격은 사람을 통해 나오기는 하지만, 사단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속임을 통해, 성경 전체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거짓 정보를 만들어 하나님을 왜곡시켰으며 인간을 죄 가운데 몰아 넣었으며,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왜곡합니다. 신약에서도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등의 거짓된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 절망 가운데 넣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거짓 속임수에 대한 이유는 우리를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상반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런 속임수에 대한 일시적인 어려움 후에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며 벗어나게 됩니다.

 3절과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다음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원문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는 고백 앞에 ‘그러나’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도, 1,2절 후에 다윗은 그동안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 속에서 숱한 배신과 음모와 처절한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에도, 부유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던가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한결 같이 자신을 지키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며 잠시나마 흔들렸던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찾게 되며 사람들의 속임수에 대해 대적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시험이나 광야 이후의 끊임없는 예수님의 하나님안의 정체성에 대한 시험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아시며, 단호하게 사단을 배척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흔드는 이야기를 할 때도, 사단의 실체를 아시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시편 3편 4절 이후에서도 셀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깊게 묵상하고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돌아볼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3,4절의 고백 이후에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하나님 안에 신뢰를 두며 승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눈물 흘리며 괴로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이시며 방패이시다’라는 것을 깨달으며 잠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둔 사람의 더욱더 확장되는 담대함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여전히 실제 어려운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세상을 향해 그 수많은 적들을 향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이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도 기쁨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절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이 되시는 지를 이같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더욱더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더 큰 담대함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이 도움 되시며 소망되신다는 고백에서 자신의 모든 서원을 아룁니다.
7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아직 대적자들에게서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 가운데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심을 기억하며 구원을 아뢰고, 그 기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원수들을 향해 승리자의 포효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8절은 그 승리의 기쁨이 절정에 달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한 희망되신다는 복음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정체성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상황 가운데 어려움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이 십자가의 삶은 우울하거나 힘든 삶이 아닌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십자가는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나타내는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 사랑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세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기다리며 고난을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지만 이 십자가가  기쁨의 십자가가 된다는 것을 약간은 생략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사하지만, 그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며 우울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의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략) 웃음은 진정한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니 웃음이 건강에 그토록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웃음은 구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피조 세계에서 구속보다 더 큰 부조화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이 이를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126:1-2)"

 하나님 안에 우리의 정체성을 두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상황이 어렵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삶이 여전히 힘들지라도 이런 웃음과 기쁨이 있으며 시편 3편의 흐름의 마지막처럼 승리의 환호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단순히 슬픔과 힘듬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상황의 어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정체성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흘러나오는 그 하나님 안의 기쁨이 열정으로 넘쳐 하나님을 당당히 선포하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열방가운데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아는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이며 소망이십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흔드는 어떤 사단의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는 자이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유일한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기쁨의 소식이 우리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편 3편의 마지막 부분처럼 세상 모든 곳 가운데 널리 전파되길 기도하며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심을 항상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고백이 늘 넘치게 하시고, 이 고백이 찬양과 기도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한 기쁨의 선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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