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imucc.com/WZ_CMS/media/view.asp?seq=45&page=&tbcode=CTS02&code=%20%20&ViewType=


이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온유 자매님의 삶 속에서의 그 고백과 감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자매님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매님의 하나님 앞에서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자매님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전받고 주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축복합니다.

'YWAM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님과 친구가 되었다!  (0) 2009.02.02
Story of the Park  (0) 2008.08.14
말레이시아가 생각나는 밤이네요.  (0) 2008.01.07
Robert가 생각나는 밤이다.  (0) 2007.12.16
기도  (2) 2007.10.23
국회의원 한 분이 예배에 오셨습니다.
총선즈음에 인사다니시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만
좌우지간 청년예배에 오셨습니다.

청년예배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앉아계신다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청년예배 찬양은 젊은 세대들도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빠른곡들이 비교적 많이 있고 일어나서 손뼉치며 찬양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표현하는 곡들이 많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음이 어려우시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눈빛을 보니 약간 초조해 보이시는 눈빛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약력과 경력을 살펴보니, 지금과 같은 분위기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리한 형세의 모 당에 소속된 분이셨습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그 분이 어느 자리에 서 있던 간에,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흘려 보내는 사람으로 서 가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펼쳐 많은 어려운 사람, 불쌍한 사람, 소외되고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에 쓰임 받으실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서 갔으면 좋겠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시고 활동을 잘 하셨으니, 앞으로도 어느 자리에 있던지 간에 리더로 서 계실 것 같으신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시길 기도해 봅니다.

-----------------------------------------

어느 분을 만났습니다. 술 냄새가 풍기시는 분이셨습니다. 나이는 50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단순히 돈을 요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배 고프시다고 밥을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모시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그 아저씨는 못내 미안해 하십니다.
약주 하셨군요? 물으니까 죄송스러워 하더라구요.
약주를 하시는 분들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좌우지간 죄송스러워 할 이유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삶을 물어 보았습니다.
짐을 나르면서 사시는데 허리를 다쳐서 일을 못하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약주를 하시면 통증이 가라 앉는다구요.
이렇게 구걸하지 않는데, 정말 죄송하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당하세요! 뭐 잘못한 거 있는 것도 아닌데! 괜찮아요. 당당해 지세요.

근처 음식점에 가서 밥을 사드리고 나오는데
갑자기 후회가 되었습니다.
가진 돈을 더 드릴껄...

나중에 제가 회의 중이라 다른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더라구요.

그 아저씨가 생각이 납니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주님 그 분에게 먹고 살 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몸도 건강하게 해 주세요!
너무 오랫동안 글을 못 올렸네요.
사실 설교문을 이 사이트 말고 다른 사이트에 올려 왔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글을 못 올려서, 딱히 쓸 말도 없고 해서 지난주 주일 청년부 설교문을 올립니다.

-----------------------------------------------------------------
 

 수련회가 끝났습니다. 수련회 동안 느꼈던 것은 수련회 자체보다 수련회를 준비하는 동안 또는 수련회 기간동안 여러모로 도와주신 분들이었습니다. 수련회에 다른 교회에서 참석하신 분들도 많이 있었는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나요?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저에게는 여러분들이 그 어떤 교회의 사람들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성품도 그렇고, 여러분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참 감사했습니다.

 또한 감사했던 것은 수련회 때 강의를 해 주시고 찬양 인도를 도와 주셨던 분들입니다. 강의에 와 주셨던 분들은 제가 군대 시절에 만났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의 믿음이나 삶에서 얼마나 주와 동행하였는지를 제가 보았을 때, 많은 힘을 얻고 혼쾌히 어려움들을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했을 때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수련회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복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우리는 복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가 추구하는 사람 자체보다 무언가 얻기를 원하는 대상적인 것이 떠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직장을 잘 얻고 또 거기에서 성공하는 것, 공부를 잘 하는 것, 명성을 많이 얻는 것 등등 우리가 복을 생각할 때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이런 것들 보다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지요.

 창세기 12장을 우리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가 복이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람 자체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또한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게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 가운데 충만하여 곧 그들이 복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라고 우리는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 사람들이 복인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선교사님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를 가서든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일 자체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사람을 섬기며 사랑하며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라.

 정말 맞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 보다도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러분 자체에 관심이 있으시고, 여러분 자체를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고 우리 자체가 본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수단이 우리 존재 자체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렇게 취급당할 때 영혼의 깊은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잘 해 주었던 점이 나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유익을 나로부터 얻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자체에 있음을 가르쳐주며 우리의 본질도 결국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1절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이 아니하고와 같이 여기서도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라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을 자신을 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알아가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련회에 참석했던 분들은 묵상 강의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꼭 나오는 부분이 시편 1편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 이런 사람이 복 있다고 합니다. 묵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내가 원했던 무언가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묵상을 하시는 분들은 묵상이 진정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성품을 알게 되고 나를 향한 계획과 사랑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뜻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럴 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기쁨이 거하게 되고 열매맺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다보면 상대방을 알아가는 기쁨이 참 즐겁습니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도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며 즐거워합니다. 물론, 사랑이 식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작은 행동조차 보기 싫지만요.

오늘 본문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그에게 기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으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어떤 예수님을 여러분들은 말씀을 통해 만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추상적으로 그냥 좋다,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표현들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자기는 내가 왜 좋아? 어, 이쁘니까?

자기는 내가 왜 좋아? 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 안에 사랑이 많이 느껴져, 그 사랑이 나를 따뜻하게 해.

어떤 것이 더 감동스런 표현입니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더욱더 풍성히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그것을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는 예전 설교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껌을 chewing 하는 것입니다. 소가 되새김질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우리 삶 가운데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상상해 보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저는 촌에서 자라서 자연들과 더불어서 살았습니다. 메뚜기 잡으러 다니고, 송사리 잡고, 소 울음 소리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데서 발을 담그고 장난도 치고 그러면서 자랐지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 생각만 해도 웃음을 자아냅니다. 얼마나 아름다고 따뜻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삶 가운데 열매가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삶 속에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하며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즐거움이 삶 속에서 넘치고, 더욱더 삶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 안에서의 인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현대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 해 놓았습니다.


5:22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5: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라는 표현도 직접 여러분들이 수분을 잘 공급받는 잎사귀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잎이 수분을 머금고 있어서 촉촉하며 파랗게 빛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매들 같은 경우에도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화장품이 좋은가 관심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피부에 수분 공급이 잘 되면 피부가 아름답고 촉촉하지요.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뿌리 박고 그 안에서 살아보십시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이 부분의 표현은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통하다는 것은 잘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는 단순히 잘 된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는 일마다 다 성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였던 다윗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소위 잘 되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근원의 목적이 하나님 안에서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위 말씀에서 우리의 관심은 뒷부분에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표현일 뿐이고, 인사의 말에서 크게 더 의미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이처럼 형통은 영혼이 잘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시편 1편에 적힌 형통이라는 표현은 요셉에게 쓴 표현과 같은 표현인데,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요셉이 형통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창세기 39:2-3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의 상황들을 보면 노예로 팔린 상황은 소위 말해서 우리가 기대하려고 했던 잘 된 상황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 삶 속에서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에 나오는 이 고백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정한 형통의 고백인 것입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과의 동행이 바로 형통함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도 형통하였습니다.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닥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해서 사람들이 보면 형통하지 않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삶이 주 안에서 형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형통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영원한 생수가 흘러나와 우리가 복이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우리가 복이 되어 그들이 생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람이 복이 되고 아브람을 통해 민족들이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 6절을 봅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은 관심이 있으시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부르시고 그의 삶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를 하나님은 순간 순간마다 살펴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결국의 길은 허무함과 생명없음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더더욱, 우리가 복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한 사람들이 되도록 복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람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여 복된 사람들이 이 땅 가운데서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찬양 부릅시다.

찬송가 495장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후 1:8-11(사도행전 18장) 키노트 자료  (0) 2008.02.27
긍정의 힘과 부정의 힘  (0) 2008.02.26
때로는...  (0) 2008.02.04
단순함이 삶을 지배하는 것.  (0) 2008.01.31
기독인들이 비판하는 법  (0) 2008.01.31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 싸움 가운데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견고하게 붙들고
우리 앞에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을 보여준
그 믿음의 조상처럼
믿음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어제 집에 오면서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바리스타를 하는 카페 이야기입니다.

그 곳을 담당하시는 사회 복지사님의 인터뷰를 들었는데
참 감동했습니다.
정신지체를 가진 분들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요.
일을 하더라도 일한 노력만큼 대가를 받을 수도 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이 사회복지사님이 아이디어를 내시고
정신지체 분들이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는 것들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서울에도 이런 커피숍이 생긴다면 자주 이용할 생각입니다.
이런 커피숍이 전국 곳곳에 생겨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맘껏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우들 뿐만 아니라
눈이 안 보이시고, 귀가 안 들리시는 분들 외에 여러 장애를 가진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지혜를 더욱더 더하여 주셔서
커피숍과 같은 창조적이고 좋은 일자리들이 그분들을 위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관련기사

http://www.sntoday.com/sub_read.html?uid=6248&section=section2
때로는 내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서울역에 아내와 아이를 마중나갔습니다.
날이 많이 춥더라구요.
아기 짐들과 기타 여러 짐들이 있어서 그 짐들을 싣기 위해
서울역 주차장에 주차하고 방문권 하나 끊어서 아내와 아이가 탄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리더군요.
어디 따뜻한 곳에 들어가 있다가 나올까 하다가
시간도 다 되었구 해서 그냥 기다렸습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저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면서 짐을 내렸습니다.
제가 충분히 들 수 있을 정도의 짐이었는데
나이가 드신 6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와서 자신이 짐을 실어다 주겠다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돈이 드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제 안에 그분께 짐을 맡기라고 하시더군요.
그 분께 얼마냐고 물으니 4000원이랍니다.

4000원 적은 돈은 아니지요.
그래도 순간 제 안에 저보다 더 어렵고 이 찬바람 속에서 하루 종일
짐 나르면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저토록 노력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그 돈 절약하겠다고 제가 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도 신나셨는지
싱글벙글하시면서 짐을 레카에다가 싣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저희가 주차된 곳까지 열심히 가셨습니다.
가면서도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하루 종일 벌어도 8000원 벌 때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아무튼 그 분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과
찬바람 속에서도 열심히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름 감동했습니다.

차에 도착하여 그분에게 4천원 대신 2만원을 손에 쥐어 드렸습니다.
설도 되었는데, 돈이라도 충분하면 가족들에게 고기라도 사 가지고 가실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동안 그 아저씨는 돈을 받고서는 정말 여러번 고개를 숙이시면서 감사하다고 자리를 떠나지를 못하더군요.
제가 오히려 죄송스럽고 그래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무엇을 할 능력이 있어도 이웃을 위해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 돈 아끼는 것도 좋지만 아끼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내가 다 해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세워주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제 안에 변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제 안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는 이해해야지 하나님 뜻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흘러나왔는데

이제는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을 더욱더 알아가고 그 사람 안에 신뢰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상대방을 잘 모르지만

그 상대방이 날 사랑하고 날 위한 마음을 알 때

그 사람을 향한 신뢰가 쌓이고 날 위해 말하는 어떤 것도 신뢰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생명을 주시길 원합니다. 복 주시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는 신뢰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런 확신이 우리 가운데 커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함이 생기며 생각보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경을 보다 보면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말씀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해되지 않아도 그런 것들을 그냥 하나님을 기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따르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 분은 신실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은 생명의 계획이며 영원한 복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 단순함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겠지만요. 사실 성경적으로 진리에 서 있는지 안 있는지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긴 하지만, 또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헷갈리지요.

어디서는 판단할 수 있다고 하고, 어디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고.

그러나,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정리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칙은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그 지체가 정말 주 안에서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내가 그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새 모 목사님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분들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제가 확인해야 할 것은 그 목사님들이 정말 주 안에서 바로 세워지고 다시금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성도들을 하나님 사랑 안에 세워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가 입니다.

그것이 없고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 크리스챤의 비판이 세상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어떤 지체를 바라볼 때 사랑안에서 무엇이든 하라고 말합니다.

비판을 해도 괜찮지만 사랑 안에서 그 사람을 정말로 위하는 마음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우리가 비판을 하려는 사람을 사랑없이 비판하게 된다면 우리안에 분노와 미움과 증오가 싹트기 시작하지요.

그것은 결국 우리 안에 쓴뿌리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 운동이나 노동자 운동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 우려되는 점이 무엇이냐면

사랑 안에서 그 사람이 변화되길 원해서 비판하지 않고 비판을 위한 비판,

그 사람이 극단적으로 말해서 파멸되길 원하는 면에서 바라보는 측면도 일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들만의 문제도 아니죠. 기독인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많으니까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라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사랑안에서 비판하고 있는가를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어떤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안에서 비판한다는 것은 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성도들이 잘못된 점을 이야기할 때

항상 전개했던 논리가 있습니다.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데, 너희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잡길 원한다. 따끔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도 사람들을 질책하실 때

그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사랑을 담아 질책하셨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진리대로 살자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담아 이야기하고 사랑을 담아 비판하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에피소드입니다.

***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광화문 촛불 집회하는 근처에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가 촛불 집회하는 곳에 들렸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국회의원들을 비난하는데, 국회의원들을 모두 죽여버리자 이런 식의 발언을 어떤 사람이 하고 거기에 참석해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광기어린 모습들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 때 우리 중보기도 모임 팀에게 주님께서 광화문 일대를 사로잡고 있는 분노와 미움의 영을 보여 주셨었습니다. 아직도 섬뜩합니다.

You raised me up! 이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전 참 약한 사람입니다.
제가 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잘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고, 주님이 저를 주 뜻대로 이끄십니다.
무엇을 제가 자랑하겠습니까?

지난 날들을 돌아볼 때
감사한 점들이 참 많습니다.
부족하고 모나고 상처 많은 사람을 주님께서 그냥 부르셨지요.
주님의 눈이 제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를 향해서 쭉 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율이 나도록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저를 볼 때 눈물이 납니다.
왜 이렇게 내 모습 이것밖에 안 될까...
그러나, 주님은 저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죄 가운데 방황하며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살았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저를 변화시키시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군요.

주님!
주님을 닮게 하여 주세요.
주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길 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길 원하고
그들이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삶 속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1. 고린도 전서를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7장 25절에 보면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26절에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40절에는 "내 뜻에는"이라는 표현도 있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표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진리이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도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이 부분에 대해선 주께 받은 것이 없다고 표현하는 부분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글에서 상당히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인지를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계시일 때는 그것은 지켜야 할 중요한 개념이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생각임을 밝힐 때는 절대성 보다는 의견 존중의 개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각임을 밝히는 부분조차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때는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바울 자신의 견해가 하나님의 뜻과 같은 권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겠지요.

2.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의 1차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관심은 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쓰는 많은 표현들은 특수한 문제 해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 테두리에서 고린도전서를 생각해야지 특수 문제 해결 방법을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보편화하는데는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3. 고린도전서 11장 16절에 보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바울은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관례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를 위하여...
설교자는 어떤 의견을 밝힐 때 바울과 같이 명확히 자신의 의견인지 주님의 계시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님의 절대적인 계시인양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서 지키고 있는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성경적인 진리인양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진리는 많이 왜곡됩니다.
우리에게 명백히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타당한 개념이 아닌 경우에는 그것을 절대화하는 메세지를 전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 전체를 흐르는 진리인 경우에는 설교자의 의견이나, 교회 전통, 문제 해결을 위한 특수한 방법등의 고정된 관념 체계를 넘어서서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수용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순함이 삶을 지배하는 것.  (0) 2008.01.31
기독인들이 비판하는 법  (0) 2008.01.3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0) 2008.01.08
덴버 ywam 총격사건에 대해 듣고  (0) 2007.12.17
사도행전 5:1-11  (0) 2007.12.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