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저는 더더욱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
주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지요...

약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 밖에 내어 놓을 게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더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강하다고 이야기한다면
주님은 바로 병든자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신앙도 자기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순간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약해서 그게 자랑이 됩니다. 힘이 됩니다.
주님은 약한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만 자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저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사는 이유되십니다.


귀납적 성경 연구에서 맛볼 수 잇는 기쁨 중의 하나는 어떤 본문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전에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궁금해할 정도로 명백하게 본문의 의미가 드러난다. 검토해 보고 또 검토해 보지만 틀림없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한다. "가만, 그럴 리가 없어.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는걸. 잠시 결정을 보류해야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갑자기 다른 누군가도 동일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글로서 나와 있다. 혼자만의 해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후 이 놀라운 발견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니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발견하도록 인도하기 시작한다.


나는 고린도전서 14:34-40에 대해 위와 같은 경험을 했다. 지금과 같은 해석은 본문을 읽고 또 읽는 중 얻게 된 것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본문 자체가 말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전서 전체에서 반복해서 하고 있는 일, 즉 어떤 주장을 인용하고(대개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견해) 그에 대해 반박한 후 잘못을 바로잡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33-40도 그와 같은 부분이 아닐까?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견해는 34-35에 인용된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이라"


바울이 이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36절에 나오며, 40절까지 전체가 반박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


"What! (무엇이라고? RSV)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 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그럴 듯 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교회에서 함과 같이", 또는 "율법에 이른 것 같이"와 같은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에 충격을 받고 그의 분노를 표출한다.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What!(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라고? 뭐라고?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라고?" 바울은 그들이 [허황되게 권위를 인용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윌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경우들은 저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인용 부분은 앞뒤 맥락과 강한 대조를 보인다.

(2) 저자는 독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저자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주장이 나와 있다.

따 라서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다."라고 말할 때(6:12, 10:23) 그는 고린도 사람들의 태도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즉시 "그러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고린도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그러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다."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고린도전서 14:34-35도 랍비들이 만든 규율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분명 구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어디에서도,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 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교회는 여자를 가르치고 여자들은 배우라고 명령하고 있다.(딤전 2:11)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 여자들도 교회에서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가르쳤다.(고전 11:4-5, 딤전 2:8-9). 14:34-45에서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랍비들의 규율을 인용한 후 바로 뒤에 이어지는 14:36에서 바울이 이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뭐라고?"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유일한 자들[이 대명사 헬라어 모누스는 남성형이다. 여성형 대명사는 모나스]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고린도 전서 14:34-35가 랍비들의 율법을 인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완전하게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고린도전서에서 인용-반박의 형식이 사용되고 있는 다른 예들을 볼 때, 그 주장이 최소한 근거를 가진 주장이란 점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1)


1) Walter C. Kaiser Jr.,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Baker Book House c.1981, p.76, 77 p. 119 참조


바 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약간은 비꼬는 듯한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부분과 유사하다. 로마서 3:3은 누군가의 잘못된 견해, 또는 누군가가 제기한 반론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그럴 수 없느니라"(KJV에서는 "God forbid!" 하나님 맙소사)라고 그가 받은 충격을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3:5,6,7에서도 동일한 형식이 사용된다. 2)


2)f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구절들 - 3:4,6,31, 6:2,15, 7:7,13, 9:14, 11:1,11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에 충격을 받고 이를 교정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고전 1:12-14,  6:1-2,  6:8-9,  6:15-17,  6:18-20,  9:5-8,  10:2-22,  11:21-22,  14:33-38


반복되는 패턴은 1)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이 있는 그대로 진술된다. 2) 바울은 "What!(무엇이라고?)"라는 말로 충격을 표현한다. 3)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대 부분 성경 번역에서는 헬라어 에타를 "무엇이라고?"라고 번역하지 않고 "또는"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고린도 전서 전체에서 사용되는 바울의 스타일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이다. RSV 성경에서는 14:34-35를 What!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 11:17-22에서도 14장과 동일한 형식이 사용된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애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7-20절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21절에서는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 그대로 진술된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바울이 받은 충격은 22절에 잘 나타나 있다. "[What! 뭐라고?]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What"이라는 감탄사로 그의 충격을 표시한 후 연속되는 수사법적 질문들로서 고린도 교회의 행태를 반박한다. 수사법적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오해와 잘못된 주장을 다룰 때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문체이다.


고린도전서 14:34-40 에서도 이와 동일한 충격과 꾸짖음의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꾸짖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사람들(아마도 남자들?)이다.

바 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35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11절에서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어쩌면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거짓 예언을 통해 나왔을 것이고 37-40절은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일 수 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방언을 금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해답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나를 혼란케 했던 구절들에 대해 갑작스럽게 얻은 놀라운 깨달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았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3)


3) 이 주제에 관한 유용한 참고 자료로는 Donald M. and Robbie B. Joy, Lovers Whatever Happened to Eden? Word Books, c. 1987. p.10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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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설교의 원리와 실제 상세보기
주승중 지음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펴냄
성경적 설교의 원리와 실제를 다룬 책. 현대 설교학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된 책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연구원에서 발행하는 <교육교회>에 '현대 교회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들을 모아 엮었다. 성경적 설교의 작성과 전달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는


성겨 설교자 등을 위한 책이다.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설교를 위한 책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성경핸드북 상세보기
김인철 지음 | 엠마오 펴냄
이 책은 성경을 연구한 강해서가 아니라, 독자가 직접 성경을 연구하고 분해하는 능력을 갖도록 성경 연구에 필요한 방법을 순서대로 소개하고 있다. 모세오경, 복음서, 예언서 등 주제별로 성경을 묶어 다루고 있다. 어려운 다른 사람의 강해를 듣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성경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다.

위의 책은 Montana에서 YWAM SBS를 수료하신 김인철 목사님께서 만드신 책입니다.
성경을 볼 때 상당히 유용한 책입니다.

성경 배경, 구조, 소단락별 주제, 원독자 등 여러 유용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SBS 전 과정을 한글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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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상반절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온전한 자들 중에서...
성경에는 사람들을 분류하여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온전한 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온전하지 못한 자들의 그룹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영적인 실체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부류들이 많지만 실체에 접근하는 부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온전한 자들이라고 여기서 적은 것은 영적인 실체를 알고 있어서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온전한 자들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전한 자들은 앞뒤 문맥을 보면 세상의 지혜, 사람의 지혜와 대립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지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사람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하길 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의 특성이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사람의 지혜를 말할 때는 그 사람의 지혜가 결국 파멸로 이끄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보라. 사람의 지혜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나아가는가?

역사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상적인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꿔왔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사람의 지혜, 한 사람의 지혜로는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면 어느 정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다수의 사람들의 현자들을 모아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지혜는 바벨탑을 하늘까지 이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정해진 운명, 한계된 운명을 개척하려는 노력은 좋은 결과를 맺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지혜를 모아도 그것이 전혀 알 수 없는 부분,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에 균열을 불러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알 수 없는 존재이고, 알기를 원하다가 죽는 존재인 것이라는 결론을 빨리 내린 사람은 현명한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영역을 향한 사람의 노력은 고린도 사회에서도 계속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고린도 사회에서도 그랬고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부분의 것들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힘이 된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의 사람들이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 와서 느끼는 것은 충격이며 두려움이다.
물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긴 하지만,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알지 못하는 것들을 시도하다가 다친 경험들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알지 못하는 것으로부터의 두려움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좌우지간, 알 수 없는 영역에서 고상해 보이는 부분이 어떤 영역인가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고린도 사회, 특히 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했던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영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라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많은 팬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결국 영적 실체에 존재하지 못했으니 이런 사람들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혜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면 그들이 오해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실체에 접근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아들이는 지혜는 결국 왜곡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자들 가운데 지혜는 말해 질 수 있는 것이며,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지혜는 쉽사리 말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말해 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껍데기를 가지고서는 그들이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지혜의 실체는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껍데기는 어떻게 깨어지는가?
외부에서의 충격들에 의해서 깨어진다.

여기서 지혜는 영적인 실체를 이야기한다고 했으니
외부의 충격들에 의해서 깨어지기 위해선, 영적인 충격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영적인 충격들, 실체의 부분들이 두드리는 망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자에 의해서라든가, 아니면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깨뜨리는 것에 의해 껍데기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외부의 충격, 즉, 하나님 말씀의 은혜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혜를 알게 되며
그 지혜를 소유하여 온전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게 들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온전한 자들 중에서의 지혜를 말한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2:6 하반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신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시대에 따라서 주된 사상적 조류가 있습니다.
사상적 조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갈급한 면들을 채워주기 때문에 조류가 되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원리도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正) 이라는 시대의 조류가 있었다고 할 때,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반()으로의 지향일 수도 있고 다운 그레이드되는 반()으로의 지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우지간 시대의 조류가 새로 탄생을 할 때에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웠던 것들, 가려웠던 것들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대의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시대의 조류를 만드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의 시대의 조류가 되는 과정에서 출발점을 만드는 사람을 선각자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설파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시대에서 유명해 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고전 2:6절에서도 온전한 자들 중의 지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세상의 지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또한 이 시대의 현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지혜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답답해 왔던 것을 풀어주는 지혜이기 때문에, 또는 시대라는 곳에 발붙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인식때문에 그것이 현 시점에서는 영원할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언제나 지속 가능한 지혜, 시대를 여러번 반복해도 남아 있게 되는 사람들의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없어질 지혜라는 표현을 2:6절에서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없어질 지혜를 찾아야 할까요?

세상 지혜, 세상에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세력있는자들(통치자들의 지혜) 즉, 현자들의 지혜...
그것이 영원할까요?

그런데 영원하다고 믿고 사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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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건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평생 신학자로 살면서 많은 복음을 전파한 故 김치영 목사와 그의 아들 김동건 교수가 나눈 대화. 암 선고를 받고 4개월 동안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남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과연 그리스도인이 실제 죽음을 맞이할 때, 정말 말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맞이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답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오늘 오전에 기독교 서점에 가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입니다.
보통 서점에 가면 책을 빨리 읽으면서 그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 보게 되는데, 이 책은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 시간동안 이 책을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김치영 목사님이 간암 선고를 받고 남겨진 4개월 동안 삶을 정리하면서 이를 지켜 보고 아버지와 대화한 김동건 교수가 지은 책입니다.

죽음을 앞두며 삶을 돌이켜 볼 때 진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때가 가장 삶 속에서 영적일 수 있는 순간인 것 같고, 가장 진실한 순간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진실함이 있고 신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인생의 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준비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일 마다 우리의 인생 끝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며 사는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본문을 얼마나 열심히 관찰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본문 관찰을 위해서 하나의 양식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위의 양식을 다운 받아서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새 제가 있는 교회 청년부예배때 설교는 고린도전서로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예로 들어 설명하도록 겠습니다.

1. 일단 고린도전서를 가르치기 위해선 고린도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번 읽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전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맞는 요절을 정합니다.
양식 맨 윗부분에 고린도전서 전체 주제에 대해서 적고, Key verse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의 한 부분을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전체 주제를 적어 놓아야만 부분이 전체의 주제를 향해 통일성 있게 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전서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 사항에 대해서 자료들을 충분히 찾아봅니다. 그 당시 시대상은 어떠했는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철학적 조류는 무엇이었는지 등등을 찾아봅니다. 요새 좋은 자료를 담은 책들도 많고 인터넷에서도 여러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은 고린도 전서 자체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외부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3. 다음으로 할 것은 설교할 본문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어느 부분부터 어느 부분까지는 연결된 최소 단위이므로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정하며 그것을 범위로 합니다.

4. 선정된 범위를 양식에 보시면 오른쪽 두 칸에 하나는 영어 성경NRSV와 하나는 개역개정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두 번역본을 기본으로 하여 저는 설교 준비를 합니다.

5. 이제 영어 본문과 한글 본문을 대조해 보면서 관찰을 무지 열심히 합니다. 그리고 관찰된 부분을 맨 왼쪽 빈 공간에다가 적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관찰할 것들이 많습니다. 사실, 한 절만 아주 잘 관찰하더라도 몇 시간은 설교할 분량이 될 수 있지만, 설교에서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청중이 누구인가를 고려하여 적정 수준의 범위에서 결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조직 신학적 사고가 설교에서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가장 훌륭한 교사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관찰을 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보아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라던가, 대조, 나열, 시제, 구약인용, 분류,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접속사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관찰 후에는 그 뜻을 해석합니다.

6. 해석후에는 이 본문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비슷한 것들이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적용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본문을 살아서 움직이게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이 부분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들, 문제점들을 평소에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7. 적용 점들을 맨 밑의 중간 칸에다가 적습니다.



*
설교를 준비할 때는 미리 본문을 선정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주일 동안 이 종이를 주머니 속에 넣으시던가 수시로 가지고 다니면서 읽고 또 읽고 하십시요. 그러면 놀랄만한 관찰들이 적힐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 맥락에서 해석을 하시면서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을 선정합니다. 그 다음에 본문과 비슷한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시면서 그 부분을 설교문의 서두에 제시하시면 좋은 설교문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절대로 공동체를 향하여 본문과 설교자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 관찰, 해석, 적용이 놀라우리만큼 풍부해지며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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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통해,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되는데,
이 책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nature, character 등을 성경 구절을 다 찾아서 분류화시킨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번역을 해 보려고 했는데, 기회나 시간이 되지 않아서 못 하고 있다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번역해 보려고 합니다.

어려운 점은, 성경 구절의 각종 한글 역본을 다 살펴보고 가장 좋은 해석을 골라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튼, 제 자신에게 유익이 많을 듯 싶습니다.

1년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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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ook is a guide that will open up a window that will allow you to see God's Character. It is an amazing collection of Scriptures put together on the character and nature of God. This is not a book but a guide that should be used in the place of prayer. It is a reference tool designed to enable you to meditate on Who this beautiful God is. Not only is a compilation of Scriptures organized around the character of God but key quotes by saints like A.W. Tozer and others on the character of God along with some insightful articles, the names of God, and more. Pages 201 By Greg E. Wi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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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유달리 긍정의 힘을 강조했던 분이 계셨다.
그분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어서
공책에다가 열심히 이론적 도식을 그린 후 보여주면서 물었다.
 
긍정의 힘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또한 부정속에 집어 넣으시면 부정 속에서 겪는 여러가지 유익이 있다.
 
사실은 부정 속에서 긍정을 찾는 것이다.
부정의 힘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긍정이다.
 
뭐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잘 전달을 못해서 인지 몰라도 더이상 이야기가 이어지지 못했다.
 
요새 뭐 긍정의 힘이니
아니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느니 여러 가지 논란이 많지만.
 
성경은 긍정도 있고 부정도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부정속에 긍정이다.
역설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낮아지면 높아지고, 약하면 강해지고...
 
모든 원리는 부정속에 그리스도의 긍정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원리로 먼저 채우지 아니하고
부정이니 긍정이니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채워지며
그 안에서 부정이니 긍정이니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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