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설교문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 설교문을 만들어 보게 되었습니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을 겪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비난들이 우리에게 닥쳐오기도 하고, 그런 상황들이 우리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여, 한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머리를 양팔에 파묻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울음이 더욱더 가슴 아픈 울음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거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에서나 혹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공격받을 때 다가 오는 울음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울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며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 등을 견디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한 상황적 어려움의 고난은 어느 정도 견딜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정체성의 근원되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다가와서 하나님안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면 이 슬픔은 깊은 영혼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시편은 단순한 인생의 아픔이나 어려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우리에게 그 정체성이 공격받는 상황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는 인생들의 아픔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상황이 힘들어서 느껴지는 아픔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공격받게 되어 느껴지는 배가된 인생의 아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 3편은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격받는 상황 속의 아픔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이 시편에 나타난 비슷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다루어지게 됩니다.

 우선, 시편 3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상황과 관련된 구절을 보면 사무엘하 15:14-17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면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는 위치에 있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로 향합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 가운데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특히, 사무엘하 15장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그 상황이 힘들었는지, 울면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상황이 단순히 현실적으로 힘든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산 모습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바로 이 상황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아픔, 즉 정체성의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상황이 힘들어서 절망하고 울기 보다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유일한 희망으로 붙들었던 그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다윗의 울음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비록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긴 했지만 그 시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바로 계속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시험과 어려움들이 닥쳐오게 됩니다. 그런 사건들의 절정이었던 부분은 바로 겟세마네에서의 슬픔의 기도였으며, 십자가에서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속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깊은 아픔이 있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현실적 상황의 아픔만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비롯된 배가된 아픔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다윗의 삶 속에서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숱한 시험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냈으며 이제는 시험이 끝났다는 생각,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순탄하게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때, 다윗의 평생의 삶도 광야 이후의 평안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새로운 광야가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깊은 인생의 슬픔과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들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와 같은 것 같습니다. 혹시, 40일 광야 이후의 삶이 이제는 광야의 시간을 벗어났으니 하나님이 나의 삶을 평안하게 하시고 내가 이만큼 견디어 냈으니 나를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이끄시겠지 이런 생각은 없는지요?
 일정 기간의 광야 시험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은 광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이 시험은 또 다른 종류의 광야인 심화된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계속 도전을 받는 시간이며, 반면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의지하고 붙들며 믿음을 견고히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40일의 광야 시험으로만 모든 연단의 과정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이후에도 그런 과정이 있게 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쳐오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정체성의 흔들림 속에서 낙심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광야의 삶을 통해 더 큰 연단과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더욱더 확고히 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며 진리를 분별하고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3편은 노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편 1절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이 고백까지는 일반 사람들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이 부분에서는 보편적인 상황의 아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그 상황 자체가 힘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 사람에게 그리 견디기 어려운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와 우리 편이 되신 다는 생각이 우리를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상황 가운데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며 이겨내는 것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적 어려움은 그 자체로 힘들 수는 있지만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절로 진행되면서 어려운 현실 상황의 아픔은 다윗의 영혼의 아픔을 자아내는 곳으로까지 상승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 부분에서 아마도 다윗은 많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생 신뢰하고 사랑하였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사람들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은 평생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상황의 처절한 아픔 속에서의,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일순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생각이 들며, 깊은 영혼의 절망감 속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며 따라가는데, 상황의 처절한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주의 사람들로부터 너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보면,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기 때문이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경험이 없으셨다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긴 우리의 정체성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상황의 어려움 가운데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에 대한 어려움 속에서 드는 괴로움 말입니다.

 3편 2절 이후에 셀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셀라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니 셀라는 시편등에 나오는 음악용어로, "높임", "올리움", "중지"라는 뜻의 '살랄'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셀라는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음악적인 지시어로서 "그곳에서 한 박자를 쉰다",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라는 용어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서 잠깐 쉬어가게 만드는 이 셀라라는 표현은 상황의 아픔을 잠깐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호흡인 듯 싶습니다.

 시편 3편 2절에서 보여지는 하나님 안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을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의 공격은 사람을 통해 나오기는 하지만, 사단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속임을 통해, 성경 전체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거짓 정보를 만들어 하나님을 왜곡시켰으며 인간을 죄 가운데 몰아 넣었으며,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왜곡합니다. 신약에서도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등의 거짓된 정보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 절망 가운데 넣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거짓 속임수에 대한 이유는 우리를 생명에서 멀어지게 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상반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런 속임수에 대한 일시적인 어려움 후에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며 벗어나게 됩니다.

 3절과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다음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원문에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는 고백 앞에 ‘그러나’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마도, 1,2절 후에 다윗은 그동안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올려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삶 속에서 숱한 배신과 음모와 처절한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에도, 부유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던가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한결 같이 자신을 지키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며 잠시나마 흔들렸던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찾게 되며 사람들의 속임수에 대해 대적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시험이나 광야 이후의 끊임없는 예수님의 하나님안의 정체성에 대한 시험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아시며, 단호하게 사단을 배척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흔드는 이야기를 할 때도, 사단의 실체를 아시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시편 3편 4절 이후에서도 셀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깊게 묵상하고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돌아볼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3,4절의 고백 이후에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며, 하나님 안에 신뢰를 두며 승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눈물 흘리며 괴로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이시며 방패이시다’라는 것을 깨달으며 잠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둔 사람의 더욱더 확장되는 담대함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여전히 실제 어려운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세상을 향해 그 수많은 적들을 향해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이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도 기쁨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절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기쁨이 되시는 지를 이같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더욱더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더 큰 담대함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도움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이 도움 되시며 소망되신다는 고백에서 자신의 모든 서원을 아룁니다.
7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아직 대적자들에게서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 가운데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심을 기억하며 구원을 아뢰고, 그 기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원수들을 향해 승리자의 포효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8절은 그 승리의 기쁨이 절정에 달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한 희망되신다는 복음의 메세지를 보냅니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정체성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상황 가운데 어려움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이 십자가의 삶은 우울하거나 힘든 삶이 아닌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십자가는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나타내는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두번째는 그 사랑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세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기다리며 고난을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지만 이 십자가가  기쁨의 십자가가 된다는 것을 약간은 생략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사하지만, 그 십자가를 우리가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며 우울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의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략) 웃음은 진정한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니 웃음이 건강에 그토록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웃음은 구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피조 세계에서 구속보다 더 큰 부조화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이 이를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126:1-2)"

 하나님 안에 우리의 정체성을 두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상황이 어렵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삶이 여전히 힘들지라도 이런 웃음과 기쁨이 있으며 시편 3편의 흐름의 마지막처럼 승리의 환호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단순히 슬픔과 힘듬의 연속이 아니라,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상황의 어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정체성 속에서도 가슴 속 깊이 흘러나오는 그 하나님 안의 기쁨이 열정으로 넘쳐 하나님을 당당히 선포하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하나님만이 모든 열방가운데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 정체성을 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아는 가운데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이며 소망이십니다.
하나님 안의 정체성을 흔드는 어떤 사단의 공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는 자이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유일한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기쁨의 소식이 우리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편 3편의 마지막 부분처럼 세상 모든 곳 가운데 널리 전파되길 기도하며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심을 항상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고백이 늘 넘치게 하시고, 이 고백이 찬양과 기도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한 기쁨의 선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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