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의 이름이 유명해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더불어

이 사이트도 널리 알려지지 않는 사이트 되게 하여 주십시요.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 알려지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의 뜻은 무엇인지를 비추는 도구 되게 하옵소서.

 

간혹 주의 뜻을 고민하다가

이 사이트를 우연히 들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이트가 되도록 하십시요.

 

부족함은 다 저의 잘못이며

괜찮다 싶은 것은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는 곳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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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것이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별로 격려를 받은 일이 없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연약함을 아는 사람에게 또는 신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분들에게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것이 더욱더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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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을 하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해입니다.

교인들 중에 과거에 교회에서 상처받은 기억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또다시 과거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모든 유사 상황들을 대입하여 추측하고

쉽게 판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은 오히려 단정해 버리는 경우를 보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주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끝까지 믿어주고 품어주고...

 

이런 모습이 과연 불가능할까요?

 

한 목사님이 채플에서 목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을 기대하지 않는다. 목자는 먼저가서 기다린다.

목자는 배신감에 치를 떨면 안되고 연약함을 이해해 주며

끝까지 목자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목자는 돌아오는 양들을 위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배신할 걸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평소와 똑같이 제자들을 대하셨을까요?

 

사순절 기간에 주님께서 이 마음을 떠올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저 주님의 그 마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요새 저의 삶에서 새기고 있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불쌍히 여기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어느 한 사람도 제외함 없이 불쌍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인생의 아픔들, 슬픔들, 역경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많이 다가옵니다.

 

두번째는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통해 배우자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사람도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즉, 끝날까지 우리는 배우는 자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하루 하루가 지날 수록 항상 겸손함 가운데

배울 수 있다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하나 하나 삶에 적용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항상 겸손하게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주가 가르쳐주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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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할 때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낮은 자리’에 찾아가 ‘작은 이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바싹 귀를 기울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서 나온 ‘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감탄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삶은 우리에게 감탄하라고 보여주신 게 아니라 그대로 따르라고 제시해준 것이라는 점이다.”(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그 후. 2007년 5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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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교회 청년부를 섬기도록 불러주심에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무엇보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루어지고 연단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청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격려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워나가고 있습니다. 주님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겠죠.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지체라고 보여지는 사람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배우는 것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배우는 자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보다 배우는 자가 되길, 항상 주님에게서 배우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평생 간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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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심히 불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사람도 자기 일에 그렇게 많은 만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리만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여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하나님께서 맡겨 주실 큰 일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을 경계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시시해 보이더라도

그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소위 큰 것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무언가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십시요.

 

그 이후에 크게 되는 것은 하나의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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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기질상 오해되는 선지자 타입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해되는 선지자는 차가울 것 같은 선지자입니다. ^^)

 

선지서들을 읽을 때 그 선지자들이 가슴 아픈 현실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그 모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이상한 방향의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차갑게 비판하는 것과 독설을 날리는 것이 마치 거대한 세상의 잘못된 파도를 헤쳐나가는 강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제대로 살고 있다는 듯의 만족을 주는 관념도 우리에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고는 냉철하게 하더라도 마음은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순화할 수는 없는가를 고민해 보게 됩니다.

 

선지서들을 읽을 때 정말 자세히 읽어보면 선지자들의 마음이 차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졌을 마음 가짐에 대해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왕, 제사장, 선지자의 삼중직을 지니신 그 모든 직책의 완성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따뜻한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인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품고 먼저 받아주시고 그 다음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에 대해 결단을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선지자의 모습을 오해해서 세상을 향해 칼을 날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과 진정한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왜 머릿속에서 비교가 되는 것일까요?

 

비판을 해도 풍자를 담고 해학이 있으며 생각하게 만드는 비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에게 날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가지지 말 것에 대해서 책망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봐도 선지자는 사람들에 대해서, 원수에 대해서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가질 것이 요구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복음서 비디오에서 한 비디오는 예수님을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위선적인 모습에 대해 풍자를 날리면 사람들이 웃음보가 터지면서 그러면서 또 진리를 생각하는

그런 광경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품으신 것처럼

우리도 잘못된 가치관에 대해서는 냉철하며 사람에 대해선 따뜻한 넓은 가슴을 가질 순 없는 건가요?

보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리 미울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미운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을 향해 날카로움을 날리는 이 입의 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난 정의로운 사람이야라고 주장하려는 내 속 깊이 오해되어진 선지자적 일부 행동방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사람들을 쉽게 정죄해 버리는 그런 못된 습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점 때문에 정작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못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받을 준비를 하셨는데, 정작 기독인들이 그리스도께 못 나아가도록 막고 있지는 않은지요?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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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태국 outreach 때 사진.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전도여행 갔던 곳에 있던 절의 스님이다.

쓰나미로 난민들이 있던 곳에서 사람들의 종교적인 의식을 돕기 위해 파견된 분이시다.

우리 전도여행팀은 난민 캠프에 일 도와주러 갔다가 그 곳에 있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그들도 난민들을 돕기 위해 집도 짓고 고아들과 놀아주기도 하였는데, 절의 낡아서 바래진 자리에 페인트를 칠해 주고 있었다.

아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낯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절에 가서 절의 시설이 망가진 곳을 고쳐주고 페인트도 칠해주고.

이런 모습이 한국에 있다면???  ^^;;;

그래서 왜 그러는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한다.

스님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고.

 

아무튼, 이 스님이 내가 태국에 갔을 당시에는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남아공에서 온 전도여행팀 하나가 자기보고 son of Satan이라고 말한 사실 때문이었다.

상처를 받은게 역력했다.

이 스님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은 오직 부다이야기를 하고, 난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말이 잘 통했다. 서로 어설픈 영어를 가지고 의미있는 대화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끝에 스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부다가 될 것이라고

나는 그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만약에 나 조차도 그리스도인으로 그분에게 무례하게 다가갔다면

난 아마도 예수에 대해서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분은 그 기회를 상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들어주었기 때문에

나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물론, 신학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이 정도 이야기로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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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요한복음 1장 35절에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두 명에게

예수님이 거니심을 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말을 듣고 두 제자가 예수를 따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보고 어디에 계시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39절에 예수님은 와서 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직접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보고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2.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을 만나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45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를 만났는데 예수다.

그러고 46절에 보면 와서 보라라고 말합니다.

 

3. 사마리아 여인이 물길러 와서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4장 40절에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예수님께서

이틀을 거기에 거하셨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4:42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듣는 것입니다.

2. 1에서만 그친다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두번째,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 직접 경험해 보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즉, 신앙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경험해 보며 나오는 고백과 결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번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복음서 안의 그 세계로 내가 들어가고, 주님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 분을 느낄 때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주님의 revelation을 통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주님의 revelation 또한 성경이 그 통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을 이론으로만 알고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 세계 안으로 푹 잠겨 보는가에 대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후자보다는 전자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시라도 우리의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의 그 세계 안으로 말씀하시던 그 현장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머물러 있어보진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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