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령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나도 나 자신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과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인생의 주인인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이런 것들은 엄격함과 율법주의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자.

그럴 때 이해가 된다.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매일 같이 볼 수 있었던 그 사람에게

갑자기 눈길이 갔던 것은

그 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3000명이 그렇게 모이기에 힘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람들이 어째서 그 장소에 같이 있었는지부터

탐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모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고

그냥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자신을 맡겼다.

 

이들은 최고였다.

 

 

과연 이런 성극팀을 또 만나 볼 수 있을까?

이들의 열정과 끼 존경스럽다.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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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 21세기 교회의 새 지형을 탐색하는 두 사람의 대화. 브라이언 맥클라렌 저/김선일 역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원제 A New Kind of Christian | 2008년 12월 ...

 


부목사님이 선물해 주셔서 읽은 책입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경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상황을 따라 살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가르쳐 오면서 성경을 너무 문자 그대로 믿는 경향들이 다분한데, 이것은 상식이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이든, 글이든간에 상황과 분리된 말과 글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말하던 글을 쓰던

그것의 내재된 상황과 분리된 말과 글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는 무의식 조차도 무의식을 불러일으킨 내재된 관념들이 존재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이란 말보다는 압축될 수 밖에 없고, 평면적으로 구성되는 한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글이 공간적이 되기 위해서는 공간을 자아내는 여러가지 표현들을 같이 섞어야 하는데, 지면의 한계상 그런 것들이 제한되기 마련입니다.

 

사실의 단순한 기록 자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라고 말하는 그것자체가 중요할까요?

그렇다면 사랑이라 할 때 그 사랑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서술문 속에는 명령적인 면과 상황적인 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언급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러이러한 면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게 되는 연속에서 말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성경도 그냥 결과적인 면만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속에서 과정 속에서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되었다. 총체적으로 narrative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더 타당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이 말한 그 순간만 기억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이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며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귀 기울입니까?

과정을 듣고 나서는 오해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성경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그 순간까지 이르는 상황과 거기에 수반된 사항들을 고려하여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준칙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같이 복잡하고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제한하고

하나님을 새장에 가두는 일은 없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고,

모든 생각 보다 위에 있으시며

모든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서 있지 않고

자신이 말씀을 그냥 다 아는 것처럼 단정짓거나

하나님 말씀을 평생 사모하여 구도자적인 자세를 갖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단순하게 판정하여

사람을 이편 저편으로 갈라

서로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 하나라도 하나님을 알게끔 인도하고

예수를 찾도록 도와주고 있습니까?

 

이 책은 지평을 넓혀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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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story를 쓰다가 textcube로 이전했습니다.

tistory에 계속 에러가 나서 해결을 할 수 없었고, textcube가 제공하고 있는 기능들이 제가 사용하는 블로그의 성격에 더 맞아서 과감히 옮겼습니다.

 

앞으로 좀 더 활성화된 블로그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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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원래 말씀하실 의도가 많지는 않으셨는데,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너무 근심하고 슬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짝 힌트를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말씀하실 것이 많지만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7절에 보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유익이고 떠나시면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20절에 제자들은 잠시 슬퍼할지 모르지만, 세상은 정말 기뻐하고
제자들도 역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구하면 받게 될 것이고 기쁨이 아주 아주 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왜 이렇게 우리 삶이 힘들고 괴로울까
예수님은 빨리 오시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이면에는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아서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가 떠나고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고
14절에 보면 예수님의 것이 성령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보다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고 예수님 것이 성령의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왜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이 오히려 큰 기쁨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생각해 봐야 할 점입니다. ^^

우리는 오히려 더욱더 기쁨 가운데 살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모습은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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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구체적인 시험보다도 전체적인 요점을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마귀의 음성을 들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시험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우리 가운데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과 대치되는 방법입니다.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갈등도 없이 그냥 하나님의 방법 아닌 것을 따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이끌어서 갈등의 현장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이끌리어 자연스럽게
그 가운데 하나님과 반대되는 쪽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끌 때, 똑같은 삶의 현장이 바로 갈등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그럴 때
물음이 다가옵니다.
너 맘대로 살아라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의 갈등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고
이 선택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삶의 부분 부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두 가지 음성 중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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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문득 구유에 나신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누추한 곳을 예수님이 날 자리로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누추한 곳을 보고 계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누추한 곳까지 보고 계시군요.

그리스도인들은 영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육의 눈으로는 가장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 높은 곳만, 편안한 곳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고 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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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이연길 목사님의 말씀과 만남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국내에서 이보다 좋은 성경공부 교재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성경공부에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성경 공부 교재를 많이 훑어보았지만 구성이 지루하며 성경공부 참여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질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답변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답변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말씀을 가지고 많이 씨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발견하는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연길 목사님께서 이런 교재를 만들어 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 곳에 방문하시는 여러분들도 꼭 구입하셔서 한번 공부해 보십시요. ^^

훈련교재(이야기식 성경공부를 위한)(말씀과만남) 상세보기
이연길 지음 | 쿰란출판사 펴냄
이야기식 성경공부를 위한 교재인《말씀과 만남》으로 그룹을 이끌어 갈 인도자를 훈련하기 위한 교재. 12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과는 90분정도 소요된다.
신앙의 기초 요한복음(말씀과 만남 시리즈 1) 상세보기
<b>이연길</b> 지음 | 쿰란출판사 펴냄
소그룹 성서연구교재. 신약성경에 나오는 4권의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 에 대해 다뤘다.

bedts와 dts훈련을 받은지 4년 정도 되었는데, 오늘 우연히 그 때 훈련받으면서 받았던 책갈피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음성 듣는법, 중보기도원칙, 남을 용서하는 법, 일이 잘 안될 때 점검해야 할 점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훈련받을 때 뭐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다시보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조이 도우슨이 평생 하나님 앞에 직접 서 있으면서 적어 놓은 원칙들은 그 깊은 믿음의 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만큼 교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것은 없겠지요.
신앙도 성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과 같은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서 그 안에 새롭게 하실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시길 원하시고 가르치시길 원합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왕이 되어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항상 겸손하게 평생을 걸어간다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설교에 하나님의 진리가 전혀 담겨있지 않다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 분의 설교는 왜 저럴까? 별로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한 적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설교자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생각하는 문제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믿는 사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교훈하시며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설교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쓰신 사례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 전체 메세지에 전혀 하나님의 메세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30-40분을 듣는 동안에 대부분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메세지라고 생각하며 아예 귀를 닫는 것 하고, 그 중에서도 혹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은 없을까 생각하며 듣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말씀은 새기지 않으면 될 것이고 진리가 있는 부분이라면 마음에 새기면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하나님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막상 설교할 때 자의적인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할 때도 그 안에 성경적인 것들이 안 들어갈 요소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메세지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사상이 다른 신학자의 이야기는 전혀 가치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부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아예 배척하는 것보다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욱더 밝혀 주시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가는 것이 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바람직한 과정일 것입니다.

나는 맞고 너는 전적으로 틀리다.
이런 것처럼 유치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유치함이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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