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자는 자기의 생각으로 뜻으로 판단하여 무엇이 옳다하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사람은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오해 중 하나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성령이 알아서 하시겠지?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이것을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음성에 따라 그것을 직접 하는 사람이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기도 열심히 다니면 하나님이 은혜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하고

성령께서 기도 열심히 해라해서 열심히 하는 것 하고

기도 열심히 다니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내 생각대로 사는 삶에 대한 반응인 것이고

두번째 것은 성령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5장 16절을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려고 노력해라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 실천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전체적으로 성령으로 사는 삶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도 보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절부터 보면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나와 있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등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음행을 안하면 우상 숭배를 안하면 하나님이 은혜 주시겠지라고 생각하여 안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너 음행 하지마, 우상 숭배하지마 이런 지시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후자가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으로 율법이냐 아니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율법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하는 것 하고

성령이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하셔서 그것을 하는 것하고

주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흔히, 성령에 이끌리어 산다라는 사람 중에는 방임주의자가 있습니다.

성령이 알아서 이끄시니 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가르쳐 주시며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거짓말 하지 말라 하셨으면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라 하시면 지적하는 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강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지적하길 원하시는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줄 까봐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은혜로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적하라 하시면 지적하는 것이 성령대로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욕구나 유익을 위해 자신만의 생각으로 메세지를 전하는 것은 또한 자기 의로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 성령께서 하라는 대로 하는 삶, 성령께 물어보고 하는 삶, 이것이 바로 율법대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실천하도록 우리의 삶을 이끄십니다.

누군가가 성령에 이끌리심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에 이끌리심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지시하고 실제적으로그 길을 걸어가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율법을 온전히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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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학교 채플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2005년) 만나서 짐 들어드리고, 싸인도 받았는데

오늘 한국에서 그것도 학교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구요.

앞 쪽에 앉아서 강력한 말씀을 듣고, 쪽팔림을 무릅쓰고 다가가서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악수도 하고 그랬습니다.

동기 하나가 싸인 받는다고 같이 기다리다가 운 좋게 방에 같이 들어가서 기도도 받고 싸인도 받았습니다.

핸폰으로 찍느라 제 모습은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들을 열방가운데 전하는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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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가룟 유다는 별반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고 부르신 제자도 있었고 나를 따르라 하신 제자도 있었고, 신기한 일을 보여주시면서 초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원리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제자들의 삶을 보면 육적인 데 초점을 맞춘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기적을 바라고, 먹을 것을 채워주고, 정치적으로 무언가 되어 보려는 욕심들이 전반적으로 지배했음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의 차이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꾸짖기 보다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면서 점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끄시려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계속 육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이 중요한 것이야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그 점을 지적하시면서 도전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육적인 욕구에만 자신의 목적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가룟유다라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 옳은 방향으로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메타멜로마이, 그냥 단순히 내적인 뉘우침만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하고 이런이야기를 했습니다.

난 적어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어도 예수님의 용서를 구했다면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점에서 가룟 유다나 우리나 별반 다름이 없다. 가룟 유다가 죽기전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생각해 보았다면, 오히려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죄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육적인 것만 추구하다가는 가룟 유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출발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같았지만, 나중은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를 정결케 하셔서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적해 주시는 것에 대해 우리의 영과 육이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히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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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질책과 심판의 메세지도 있습니다.

그런 구절들을 그냥 읽는 것 하고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질책을 하시며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가를 생각하고 읽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꾸짖으실 때 하나님이 아파하시면서 꾸짖으시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

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질책하시는 하나님 속에 사랑의 눈물이 담겨 있음을

몸으로 깨달았던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회개하라 하는 메세지 속에 사랑을 담지 않고, 아픔의 눈물을 담지 않고 이야기해도 안되겠고,

들으면서 그 메세지 속에 있는 하나님 마음의 아픔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그냥 들어도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으로 읽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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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항상 힘들 일이 있는 곳마다 무너진 곳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인간의 성정인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아닌 왕을 세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둥과 비를 내리셔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시니,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19절에 보면 당신의 종인 우리를 위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드려주세요. 우리를 내버려 두지 마십시요. 우리는 많은 죄를 지은데다가 왕을 구하는 죄를 더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22절에 보면

MSG 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이지요.

 

MSG 번역은 좀 다릅니다.

나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만약,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대신 나는 나의 자리에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 당신들에게 살기 위한 옳은 길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들을 떠나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계속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역의 차이가 상당합니다. ^^ 그러나, 핵심의미는 똑같습니다.

둘다, 힘들어도 당신들을 떠나지 않고 계속 있는 자리에서 기도하며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증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맥을 보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이 사무엘이 마음을 굳게 먹고 한 말로 볼 때, MSG번역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가 아니라, 너희를 떠나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 이런 말이지요.

 

아내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최소한 공동체가 힘들 때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그 말이 맞다고 봅니다.

 

언제든지 우리들은 사무엘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이 가르쳐신 것들이 나의 생각들과 충돌할 때

내 생각들을 내려 놓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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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안타까움이 많이 묻어 있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 살려고 하고, 사역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에 힘드니, 세상으로 많이 가는 현실의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대조가 강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디모데에게 2절에 너는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 그것이 때가 좋던지 안 좋던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대로 꾸준히 행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4절에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않고 관심도 없고 자기 욕심만 채워줄 것들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길로 간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5절에서

그러나, 그러나 너는 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그러나, 너는 그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바울 사도의 간절한 마음 말입니다.

 

4장 9절 이하로 보면

세상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모데도 바울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 둘 씩 하나님 곁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사역자 말입니다. 그 속에서 바울은 얼마나 안타까움을 느꼈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만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애절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마음도 이와 같으리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죠.

그러나, 너는, 너만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다 떠나고 사람들이 배신해도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사랑의 마음을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장면은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했고, 베드로가 드디어 고넬료가 있는 집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베드로는 10:29절에 고넬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요.

고넬료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일을 말합니다.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고, 이웃을 도운 것을 기억하시고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다 모였습니다.

 

여기서 참 놀라운 것은

고넬료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MSG 번역을 보면

베드로님,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신 무엇이든지 듣기 위해 준비되어 있고, 지금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베드로 앞에 있다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은 참 놀랍습니다.

 

항상 모임들 가운데, 예배 가운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곳에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자주 환기시켜 주시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어떤 모임에 와 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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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사역자들이 누가 좋고 누가 안 좋고 이런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 사역자는 농담을 잘해, 이 사역자는 말을 참 잘 해, 이 사역자는 내가 보기엔 이래 이런 식으로 말들을 많이 만듭니다.

이런 점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4:6절을 보면 기록한 말씀 밖으로 라는 의미를 MSG 번역에 보면 from God's point of view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문맥과 상관없이 기록한 말씀 밖으로 가지 말라 이렇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사람을 보고 판단할 때 기준이 바로 from God's point of view 라는 것입니다.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text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배운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화내게 하고 비판합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뭐 저런 이상한 인간이 다 있어? 이런 식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실까라는 측면에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를 정말 열받게 해서 저 사람의 버릇을 고쳐 놔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생각하니 오히려 저 분을 축복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기도하라라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God's point of view입니다.

 

교인들이 사역자를 볼 때도 God's point of view로 보면 달라집니다. 오히려 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에 사로잡힌 사역자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사역자들끼리 누가 능력이 좋고 나쁘고 이런 눈으로 사역자들을 교인들이 비교하길 원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유명한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좋네 저 사람이 좋네, 뭐 사람 마음이니 다 그럴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우리는 모두 다 능력이 있던 없던 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같이 만들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비판하기 보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4:2절에 그냥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이 사역자들에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판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쓰다 보니 정작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는 때가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잘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이라면 저 분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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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yworld.com/view/20090421n12738

 

위의 링크 기사를 보고 마음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월드비전의 1:1 후원결연하고 왔습니다.

http://worldvision.or.kr

 

혹시 생각 있으신 분들도 한 달 30000원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수 있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 1000만 성도라 하는데,

그 중의 반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경제적 능력이 되는 사람들일텐데

한 사람 당 한 명씩 1:1 결연하면

500만명은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튼, 국제 NGO가 있어서 또한 한국 NGO가 있어서

구호 사업에 앞장 서 주시는 것을 보며

참 많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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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노르웨이의 젊은 부부를 만났었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것을 좋아한 20대의 젊은 부부입니다.

신혼 여행차 말레이시아에 왔다가 SBS를 해 볼까 해서 SBS를 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북한을 돕기 위한 운동도 하고

북한에 물품도 보내고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선진국은 선진국이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노르웨이하고 북한하고 어떻게 보면 연결이 안되는데,

그 먼 나라에서도 북한의 구호에 관심을 가지는데

나는 어떠한가 라는 생각에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세계 여러나라의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실제적인 도움을 줄 때

선진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한국이 국제적인 어려움에 기여하는 것이

별로 안되는 걸 보고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그 분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라는 걸 많이 느낍니다.

 

돈을 쌓아두고 부동산 불리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특히 기독인들이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지배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돈에 지배당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가진 것으로 베풀며 사는 일들이 많아졌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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