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지 여러 날들이 흘렀습니다.
제 안에 점점 기도가 자연스러워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나누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넓은 마음을 갖기 못했던 모습에서
점점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압박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외식적인 기도이면 어떻하나? 이 기도가 기복적이면 어떻하나?
정작 이런 압박관념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괜히 내 기도, 나의 필요에 대해서 기도하면 죄책감이 느껴지고
뭔가 광범위하고 큰 기도가 없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점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우에 오히려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생각보다 외식이니,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수준에 머무느니를 논할 단계는 아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다보면, 점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금의 우리의 기도속엔 적다할찌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부족함을 아시고 덮으시고 주의 뜻을 알도록 변화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칼빈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군요.
신자들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된다.
우리가 기도를 잘못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도가 정결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그동안 기도에 대해 위와 같은 생각을 해 왔었는데,
칼빈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듣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과 우리의 모든 행동의 중심에는 의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가 어떤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보좌 앞에 그리스도로 힘입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보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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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수술이 잘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많은 분들의 기도로 잘 회복되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Russal의 새로운 소식입니다.

Dear Jang,

Greetings in Jesus name, once again we are so glad to give you a quick update that we find a new house yesterday!!! Thank you so much for all your prayers.

Since 9 years we are staying in a house, 6 month back house owner said to leave the house before the end of May 2008, we were looking for a new house from the time he said, no one was willing to give their house to stay our babies, whoever we approach they said: you have 9 babies with you, so we can’t give our house to all of you stay, really we tired and we kept in prayer, looking upon God and we declare it in Jesus name.

Praise the Lord! Yesterday one couple agrees to lease their house for us. this house is smaller than one we staying and also the monthly rent is double, we are paying Rs. 5,000.00 for this previous one, but the new one Rs. 10,000.00 ($257) monthly rent and Rs. 50,000.00 ($1283) cash advance, 7th of this month (May) we have to pay the advance and get the rental agreement copy, so far God is leading and providing us in amazing ways, for the rest too we trust in Him.

We urge you to keep praying for us, once again thanks for your valuable prayers; We love you and keep praying for you.

 

In His Grace,

Russal, Kumari and Kids.

…Click here…

 

 



우리 안에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또는 내가 본받아야 할 사람, 내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

성경을 볼 때도 이런 의식이 작용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을 보면 본받아야 하고
하갈, 이스마엘, 에서 등을 보면 본받지 말아야 하겠다라는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있는 개성적이고 다양적인 것이 무시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해야지 하는 기준에 벗어나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절망 가운데 사로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리는 신앙의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끊임없이 긍정을 외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교회 봉사에 몰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고...
혹시 이런 모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또는 이런 모습이 신앙의 표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듣게 되는데,
부모가 기대하던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지니지 못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녀들을 보게 되고
교회에서 기대하는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지니지 못한 것 같아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차별하셨던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존중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속에 아브라함 등의 우리가 신앙적으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로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선택은 과연 그 사람들의 어떤 행동적 뛰어남이었을까요?
그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적인 인류를 향한 사랑의 선택 중 일부였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택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과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조연으로 보여지는 과정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버려졌던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보면 뛰어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도 실체를 멀리서 희미하게 보았다라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멀리서 보고 기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약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명백히 보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나 하갈 같은 사람이나 그닥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신약으로 가면
이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압니다.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가 좋게 보던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우리가 안 좋게 보던 하갈과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제는 모두 다 하나님 안에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이런 구분들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격이 이러하든, 저러하든 신앙의 바람직한 표준이 이러이러한 모습을 지녀야하든, 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며 상처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한 가족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성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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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제가 섬기는 교회 청년부에서 기도회를 합니다.

몇 명 모이진 않지만
주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수요일 그 시간을 끝까지 지켜 주고 그 자리에서 같이 기도하는 청년들을 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확장되는 것을 기대해 봅니다.

창세기에 보면 롯을 위해 간청하는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주십시요.

주께서는 항상 가능성을 보시는 것 같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도무지 주의 사람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 때는(주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없어서)
심판하시며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의인 10명이 있으면 주님 이 땅에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통해 일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이런 간청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한명이 있더라도 주님 그 한 명의 가능성을 보시고
이 땅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이렇게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그 의인의 무리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의 길로 가더라도
그 길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의인의 무리에 들며, 주님의 뜻을 이 땅가운데 전하며
주의 거룩함이 이 땅 가운데 설 수 있도록 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예배자 -  트리니티 라이브워쉽/설경욱 사.곡 +

~~ ♬♪♩ 예배자 ♬♪♩ ~~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 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br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 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 곳
주의 거룩한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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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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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5: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5: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1)
관찰: 자주 반복 되는 단어 중에 너희라는 단어가 있다.
해석 :문맥상에서 볼 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음행을 범한 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너희라는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문제 제기에 있어서 음행을 범한 자가 원인이 되었지만 그 죄에 대한 처리 방법이나 그 죄에 대한 부분들에 있어서 공동체에 공동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적용 :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에 대해 공동책임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수반되는 것이다. 사랑만 강조하다가 방임으로 흐르지는 않는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2)
관찰 :
5:2  너희가 교만하여 졌다.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교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해석) 5:8절에 보면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순전함과 진실함의 표현을 쓰고 있다. 순전함과 진실함은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진실함의 영어 표현은 truth로 되어 있는데, 진리를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만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보다는 자기의 기준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행동들을 범했다. 구약에서도 보면 구원자가 하나님이기 보다는 애굽이나 바벨론을 의지할 때가 많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에 음행의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즉,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대해야지, 고린도에 유행하였던 영지주의에 바탕을 두어 그것에 따라 판단하며 면죄부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적용)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을 권면할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접근하는가?

3)
관찰:
5:5 사탄을 언급한 부분
해석 :
이 부분은 해석하기 너무 어렵다. 저자의 의도는 사탄 자체에 있지는 않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사탄에게 내어줌은 영적으로 구원으로 이루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사탄의 존재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유익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적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탄에 의해 시험받으셨다. 사탄은 자기의 존재의 거대성을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며 세력없는 하나의 자기 교만의 절정이었다. 하나님은 사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데 이용하셨다.
결국, 여기서 볼 수 있는 점은 사탄이 자기의 의도를 행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 안에서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문맥상 해석 가능하다.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느끼는 것은 탕자의 비유이다.

4)
관찰:
5:7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해석 :
결국 논리체계는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 희생되셨으니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는 것이다.
먼저 나오는 것은 예수가 무엇을 하셨느냐라는 것이다.
바울의 논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셨으니, 이제 어떻게 너희가 살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5:8
관찰 :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해석 :순전함은 음행의 부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저자는 음행의 문제에 대해 순전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있고
음행의 문제에 대해 방임을 하는 공동체를 보며 교만에 따라 너희의 뜻대로 판단하지 말고
진실함, 즉, 진리 위에 서라고 말하고 있다.

더 생각해 보기:
5:1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다.
 일단 이 말 자체에는 교회 공동체가 이방인들의 모습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안 믿는 공동체와 행위적인 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 공동체는 구별되고 있는가?
 구별되고 있지 않다면 어느 부분이 특별하게 그런가?
 문맥에서는 음행의 특정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보편적 진리를 추론하자면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이 교회 가운데 있는것인가?

5:6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로 퍼진다.
죄의 전염성이다.
내가 지은 죄가 공동체에 해를 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죄에 의해 공동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죄에 대한 결과가 공동체로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가?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까지 만들었다.
(아담 한 사람의 죄의 확장성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죄 인식에 있어서 공동체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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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tv에서 노회찬 떨어진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고등학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노회찬 아저씨는 항상 사회의 소외된 자와 함께 했고 약한 자들 편에 서셨다는 내용의 편지였는데, 노회찬씨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나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는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과 함께 있고 그들을 위해 살고 있는가?

오늘... (밤 12시가 넘었으니 어제다.)
밤에 서울역에 갔다.
혼자 차를 몰고 가서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먹었다.
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 햄버거 먹으며 이곳 저곳을 살펴보니 참 좋다.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 답답하면 차를 몰고 거니 플라자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공부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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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라는 말...
어디와 어디 사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만,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싶다.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한 것처럼.

가끔은 만나고 헤어지는 자리 역이나 공항 같은 곳에 나가서 있는 것만으로 괜히 기분이 묘해진다. ^^;;;

햄버거를 먹는 유리 사이에 노숙자가 보인다.
이것도 '사이'라는 개념속에 있는 두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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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4:9 내가 생각하건대
-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무언가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에는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들, 내가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을 겪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생각하건대라는 표현을 하나님께 대해 쓸 날들이 우리 인생가운데는 많다.
4:10
-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는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게 만들고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일이라는 것을 알 때 그런 회의와 물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해 볼 점 :
내가 생각하건대 나에게 왜 이런 어려운 일이 닥칠까? 라는 의문이 생길 때
점검을 해 볼 것들이 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일들이 닥친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나의 욕심으로 인한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우리는 어려움에 대해 자책하거나 자신의 신앙 문제로 돌리는 등의 좌절 속으로 자신을 집어 넣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왜 이런 상황이 내게 닥쳐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신앙의 나쁜 표현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며 성경적 질문이다.
예수님도 이런 질문을 본인에게 스스로 하실 때가 있으셨다.

4:10-13
대조의 표현들
- 신앙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 뜻을 아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고난이 있지만,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 안에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인생이 겉보기에도 잘 풀릴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잘 풀리지 않아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인정 못 받고, 후원도 못 받고 자기가 스스로 수고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써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비교하게 된다. 나는 죽도록 고생하여 이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저 사람은 기도 한 번 하니 어디서 재정도 흘러들어오고 하나님이 다 채우셨다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좌절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와 다를 때가 많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인정 못받고 고생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자신이 대접 못 받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봐야 할 점들 -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떠하셨는가? 제자들, 사람들을 돌보면서 정작 자신은 굶주리실 때도 많으셨고, 쉬지 못하실 때도 많으셨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시고,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4:14
바울은 사랑안에서 권면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이 본이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도도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스스로의 자괴감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무슨 충고나 무슨 훈계도 사랑안에서 하지 않으면 오히려 해를 끼칠 때가 많이 있다.
사랑안에서 권면하는가?

4:15
스승과 아버지
일만 스승과 아버지의 대조
대조 되었다는 것은 은연중에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만 스승보다 아버지가 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안에서 자녀를 낳았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스승은 아마도 삶의 방향성을 충고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번역본에 보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해 주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살다보면 스승같은 사람들은 많다. 특히나 교회에서 충고를 해 주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많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야, 그건 옳지 않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정말 그 어려움을 헤쳐나오도록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시간 내고 기도해주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또한, 단순히 가르침을 주려는 사람은 많지만, 제자를 삼아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열정을 다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만 스승보다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제자 삼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멋있어 보이는 말 한마디를 날리는 스승인가?
고린도 사회에서도 스승은 많았다. 그러나, 복음안에 서도록 눈물로 양육하고 섬기는 아버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17절에 디모데를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로 양육하였듯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자녀인 디모데들이 많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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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에서 강의 하던 한 분이 자주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성경적 사고에 바탕을 둔 것인가에 대해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쓸 데 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측으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좌절가운데 빠져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말씀 가운데서 우리의 행동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말씀과 비추어보아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괜한 정죄감속에 우리를 집어 넣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Is it biblical?

우리의 행동에 대해 위의 질문을 던지면서 말씀은 우리 행동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찾아본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많은 유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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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를 할 때 staff 중 한명인 Dave는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일주일에 요일별로 주제를 정해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로 월요일은 SBS 학생들을 위해서, 화요일은 가족을 위해서, 수요일은 베이스를 위해서, 목요일은 나라를 위해서, 금요일은 선교를 위해서 등등 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영역별로 균형있게 기억하면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번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빼 먹는 영역들이 있는데 요일별로 영역을 정하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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