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곳곳에 불타는 떨기나무를 세운다.

불타는 떨기나무 in 신촌

불타는 떨기나무 in 연남

불타는 떨기나무 in LG, 한전 등

불타는 떨기나무 in Jang's Family

불타는 떨기나무 in **대학교

불타는 떨기나무 in 문화

불타는 떨기나무 in 정치

불타는 떨기나무 in 교육 등

 

하나님께서 언젠가 저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연약한 나무인데 그것이 그냥 놔두면 사라질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사그러들지 않고 어둔 광야를 비추는 나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불타는 떨기나무들을 세울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 활활 타오르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보며 세상은 주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가 교회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불타는 떨기나무의 비전을 가질 때 여러분이 있는 곳이 주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타는 떨기나무입니다.

mailto : holynfire@naver.com (불타는 떨기나무 sk)

cafe : cafe.naver.com/holynfire

 

 

하나님 나라의 게릴라 가드닝 운동 - 불타는 떨기나무

https://www.youtube.com/watch?v=thifC29Ezz4

성경은 그 자체의 문맥을 통해 어려운 점이 풀리도록 된 부분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단어조차도 문맥 안에서 해석이 되어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단어는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툭하면 그 진정한 의미가 변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단어들의 사용되는 사례들이 예전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뜻에서 거리가 먼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어의 단어 뜻만 보고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라고 분석하는 것은 오류를 낳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단어는 문장 내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게 됩니다. 문장은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해 지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문장을 통해 단어의 대체적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6장 7-8절을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 중언부언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한 말을 또 이야기하는 것 이것을 흔히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들을 많이 듣습니다.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은 안 좋다. 그게 중언부언의 기도이다.

 단어 자체로 보면 그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정말 여기서 사용된 중언부언이란 말이 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중언부언의 기도라 치면 예수님은 중언부언의 대가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의 기도도 똑같은 문장을 세번이나 기도하셨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7절에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이방인이 했던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신다고 생각했다.

 즉 진정한 중언 부언은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많이 할려고 하는 것, 더 분명하게는 8절에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데, 이방인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다 구해야 하나님이 알아들으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많이 할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중언부언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안 말씀드리면 안 들어주시니까, 하나 하나 다 빠지지 않게 말하고, 그리고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은 들으시니까 어떻게든지 말을 많이 만들어내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중언부언의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잘하지 못해도, 다 구체적으로 아뢰지 못해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들어주신다라고 8절에 말씀하시는데,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열심히 말을 많이 해서 빠지지 않고 아뢰야 들어주시는 신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모임에 나갔는데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출근을 하는데 강북에서 강남으로 다리를 건너 출근하니 시간이 한시간 이상 걸렸다. 그 다리가 정말 많이 막혀서.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다음번에 발령받는 곳은 다리 건너지 않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집이 강북의 동쪽끝이었는데 다리는 안 건너게 되었지만 서쪽끝으로 발령받아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도할 때 정말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지 않되 30분 이내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런 우스갯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리석습니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심지어 우리가 부족하여 필요를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해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데요.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다른 이방신처럼 생각해서 말을 오래해서 감동시키려는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많이 하고 주문을 만들어서 하루종일 그것을 들려주면서 신의 인도하심을 억지로 감동시켜 받아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좋은 아버지께 때로는 그분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으로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신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문맥을 통해서 명확하지 않은 의미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잇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 지고 따라오는 삶을 이야기하셨는데

여기서 십자가 지고 따르는 삶은 무엇일까요?

 

문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6:21-23절에 바로 이어서 24절이 나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고 주여 그리 마소서, 이일은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바로 이어서 십자가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십자가 지는 삶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며 순종하는 삶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마태복음을 계속 읽으면 반복되는 것이 있는 데,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것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왔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것도,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던 삶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골고다 십자가 지셨던 것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지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모든 삶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을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고자 하셨던 것을 하기 위해 달려 왔던 삶이었습니다.

그 정점에 골고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의 인생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쉽고 편안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것들을 하고자 할 때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는데, 너는 그래도 그것을 하겠는가? 순종하며 하나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넓은 길은 편안하고 좋아보이지만 필경 사망의 길이고, 좁은 길은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생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든 멸시와 조롱과 어려움을 감당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맡겨주신 사명과 뜻을 순종하며 나아갈 때 십자가를 지는 삶이요, 좁은 길로 가는 삶이겠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의 삶이요, 천국의 삶이요,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 지고 따르겠는가?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겠는가?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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