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그 자체의 문맥을 통해 어려운 점이 풀리도록 된 부분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단어조차도 문맥 안에서 해석이 되어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단어는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툭하면 그 진정한 의미가 변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단어들의 사용되는 사례들이 예전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뜻에서 거리가 먼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원어의 단어 뜻만 보고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라고 분석하는 것은 오류를 낳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단어는 문장 내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지게 됩니다. 문장은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해 지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문장을 통해 단어의 대체적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6장 7-8절을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 중언부언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한 말을 또 이야기하는 것 이것을 흔히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들을 많이 듣습니다.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은 안 좋다. 그게 중언부언의 기도이다.
단어 자체로 보면 그 말이 맞겠지요! 그러나, 정말 여기서 사용된 중언부언이란 말이 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중언부언의 기도라 치면 예수님은 중언부언의 대가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의 기도도 똑같은 문장을 세번이나 기도하셨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중언부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7절에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이방인이 했던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 하반절에 보면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신다고 생각했다.
즉 진정한 중언 부언은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많이 할려고 하는 것, 더 분명하게는 8절에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데, 이방인들은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다 구해야 하나님이 알아들으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많이 할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중언부언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안 말씀드리면 안 들어주시니까, 하나 하나 다 빠지지 않게 말하고, 그리고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은 들으시니까 어떻게든지 말을 많이 만들어내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중언부언의 기도인 것입니다. |
결국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잘하지 못해도, 다 구체적으로 아뢰지 못해도,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들어주신다라고 8절에 말씀하시는데,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열심히 말을 많이 해서 빠지지 않고 아뢰야 들어주시는 신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모임에 나갔는데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출근을 하는데 강북에서 강남으로 다리를 건너 출근하니 시간이 한시간 이상 걸렸다. 그 다리가 정말 많이 막혀서.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다음번에 발령받는 곳은 다리 건너지 않게 해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집이 강북의 동쪽끝이었는데 다리는 안 건너게 되었지만 서쪽끝으로 발령받아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도할 때 정말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지 않되 30분 이내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런 우스갯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리석습니까?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심지어 우리가 부족하여 필요를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해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데요.
중언부언의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다른 이방신처럼 생각해서 말을 오래해서 감동시키려는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많이 하고 주문을 만들어서 하루종일 그것을 들려주면서 신의 인도하심을 억지로 감동시켜 받아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좋은 아버지께 때로는 그분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으로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신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문맥을 통해서 명확하지 않은 의미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